제 3 호 Burnout Syndrome (燒盡)
Burnout Syndrome (燒盡) 202110353@sangmyung.kr 정기자 송지민 “ … 저는 잘하는 게 없어요.” “좋아하는 것들에는 뭐가 있나요?” “제가 좋아하는 건...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잘하냐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을까?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고 해도 떠올려낼 수 있을까.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잘하는 것이 있긴 한 걸까?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는 뭐가 있을까. 맛있는 음식과 쉬는 것이라 대답하기에는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개성도 없고 재미없는 건조한 사람 같달 까나. 그렇게 보이긴 싫은데...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문득,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항상 나눠주던 설문지가 생각난다. 나의 취미, 나의 특기, 나의 장래 희망 등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질문이 적힌 설문지 말이다. 그때에는 망설임 없이 적어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나에게 그 설문지를 다시 준다면 나는 그때처럼 써낼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보다 10년은 더 살아,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모든 것들이 딱히 신나지 않고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며, '그 특별하지 않은 것이 결국 나 자신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내려 걸었다.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목적 없이 걷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걷다가 교보문고 간판이 눈에 띄었다. 평소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책을 읽지 않고 있었기에 '이참에 책이나 읽어볼까?'라는 생각으로 교보문고에 들어섰다. 계단을 내려가 교보문고 입구로 들어가니 매우 많은 책이 있었고, 그러한 책들 사이에는 책을 고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리고 그 많은 책 가운데에는 '베스트 셀러' 책들이 진열된 곳이 있었다. 그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진열된 책들을 보고 있자니, 모두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나로서 충분히 괜찮은 사람”,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등등... 마치 그곳에 있는 모든 책이 제목만으로도 나에게 '너는 있는 그대로도 멋진 사람이야!',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살짝은 진부하게도 느껴지면서, '왜 이런 비슷한 내용을 말하는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베스트 셀러를 차지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인건가? 모두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건가? 이런저런 궁금증들이 생겼다.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하다. '번 아웃', 1974년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로이덴버거에 의해 과로의 결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진단되었다. '번 아웃'은 탈진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 반면 '번 아웃'은 그 지점에서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는 앤 헬린 피터슨의 책 '요즘 애들'에 나오는 '번 아웃'에 대한 정의이다. 대충 어떤 것인지 감은 오지만,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번 아웃 증후군' 증상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여러 개의 자가 진단 테스트들이 있었고, 훑어보니 대부분 나와 들어맞는 것 같았다. '증후군'이라는 명칭이 붙어 뭔가 대단한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별거 없어 보였다. 모두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문항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번 아웃 증후군’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찾아보고 싶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청년 번 아웃’, ‘20대 번 아웃’과 같은 키워드들을 검색해가며 찾아본 결과, 동아일보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령별 통계를 찾을 수 있었다. 통계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그림 한국인 얼마나 ‘번 아웃(탈진)’ 됐나 출처 : 김재희(2017), 희망 잃어버린 20대, 가장 지친 ‘탈진 세대’, 동아일보, 2017.04.03. 그림 20대의 번 아웃 원인 및 해결 방식 출처 : 김재희(2017), 초중고부터 경쟁의 무한궤도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20대, 동아일보, 2017.04.03. 20~30대가 가장 많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모든 연령대가 비슷한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에너지 저하를 느끼며 몇몇은 탈진 증후군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찾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청소년도, 대학생도, 취업준비생도, 직장인들도 그리고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고충과 내면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이 왜 ‘번 아웃 증후군’을 겪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기에는 너무 어리다. 그래서 해결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두 번째 통계, <번아웃이 됐을 때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면 20대의 ‘번 아웃’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하는 건 음주, 수면, 폭식 등 본능적 욕구 해결. 좋지 않아 보인다. 그 당시의 무료함은 잠시 없앨 수 있겠지만 지속해서 보았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 외에 친구, 연인 등 사람들과의 만남과 여행, 휴학, 휴직 등 장기간의 재충전 기간은 언뜻 보기에 건강한 방식 같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서 힘듦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마음대로 여행을 다닐 수도 없기에 적용할 수 없는 해결방안이다. 휴직 또한 경제적인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므로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결정을 쉽게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취미 활동, 텍스트만 보면 간단해 보인다. 취미 활동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도 있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또한 밖에서도 할 수 있고, 집 안에서도 할 수 있다. 가장 건강하고 나 자신을 계발할 수 있는 즐거운 활동 같아 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취미를 찾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나부터도 내 취미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미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라고 한다. 나는 위 정의에서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문구가 가장 와 닿았다.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마치 내가 잘하는 것을 취미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취미 활동을 시작하려 해도, 내가 잘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포기하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하찮고 귀여운 것들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캐릭터 스탬프나 마스킹 테이프, 놀이동산에서 파는 조그만 반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밤새 몰아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공간에서 편안한 자세로 밤새도록. 또, 비 오는 날에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으며, 마루에서 얇은 이불 하나 덮고는 낮잠을 자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적고 나니까 확실히 멋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취미라고 할 수 있는지도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저러한 것들을 할 때 즐기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별생각 없이 무던하고 잔잔하게 지내던 내가 의욕이 생기고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많은 것이고, 또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잘하는 전문적인 일들을 할 때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며 그것이 취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마음이 편해지는지 생각해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취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지치고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사회는 계속해서 더 빠르게 발전할 것이기에, 그러한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바꿀 수 있다. 더 심한 무력감으로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들기 전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며 그것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보려고 하자. 단번에 무력감과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지쳐가는 시간 틈 사이사이에 우리가 좋아하는 시간을 차곡차곡 넣어보면, 전과는 다른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재희(2017), 희망 잃어버린 20대, 가장 지친 ‘탈진 세대’, 동아일보, 2017.04.03.,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0403/83654657/1> 김재희(2017), 초중고부터 경쟁의 무한궤도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20대, 동아일보, 2017.04.03.,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70403/83654822/1> 정예은(2018), 달리다 멈춰도 괜찮아,청년 번아웃, 덕성여대 신문, 2018.11.26., <http://www.dspres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156>
제 2 호 작은 네모에 담긴 프로파간다
정기자 이선우 fhfgdvd96@naver.com 이 작은 네모는 조선에서 처음에 ‘우초’라 불렸다. 1884년 개화파 정치인 홍영식이 도입한 이것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 우정총국이 폐지됨으로써 불과 한 달도 사용되지 못하고 10년간 잊혔다. 이후 1895년에 우편업무가 재개되면서 이것은 우표라 불리기 시작하며 민간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되었으나 이것은 대한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념우표가 되었다. 어두운 세월이 흘러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이후 처음으로 발행된 보통우표에는 이순신 장군과 이준 열사와 같이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위인들의 초상이 들어갔다. 새로운 나라의 우표에서 더 이상 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얼마 안 가 우표에는 새로운 왕이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한복을 입고 등장한 초대 대통령, 양복을 입고 하야하다 [그림 1]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부터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미협회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독립운동을 이끌어오며 국내와 해외에서 인지도를 쌓았기에 광복 이후 새로운 정부의 유망한 지도자 후보로 주목받았다. 다만 그의 주 활동지역이 미국을 위주로 한 해외였고 외교적 독립운동을 주도했기에 김구를 비롯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보다 민족적 색채가 부족하다는 결점이 존재하였다. 이를 의식한 듯 이승만이 처음으로 등장한 우표인 ‘초대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에는 그가 평소에 즐겨 입던 양복을 입은 모습이 아닌 한복을 입은 모습이 담겨있다. 이 우표가 발행되고 얼마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한복을 입고 등장하였다. 우표뿐 아니라 한국은행에서 최초로 발행한 은행권에도 한복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들어갔다. 이러한 대통령의 이미지는 양복보단 한복이 더 보편적이던 당시 생활상을 고려했을 때 대중들에게 더 친숙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우표와 은행권에 담긴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점차 원래 그의 모습대로 양복을 입은 초상으로 전부 대체되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중 강압적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독재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이후 과거의 정적들이 소멸된 환경에서 새로운 왕으로서 우표에 등장하였다. 그 화룡점정은 1956년에 발행된 ‘대통령 제81회 탄신’ 기념우표이다. 이 우표는 작년에 이미 제80회 탄신 기념우표가 발행되고 뒤이어 발행된 우표로서 당시 관에서 대통령을 찬양하고 선전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해 2번째로 연임한 이승만 대통령을 기념하는 ‘제3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마지막으로 그는 초대 대통령임에도 우표에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였다. 군인 대통령의 시대, 군인과 대통령이 주인공으로 나서다 4.19혁명으로 무너진 제1공화국을 뒤로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제2공화국은 혼란한 정국 속에 1년이 체 못 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전복되었다. 이후 30년 넘게 대한민국은 군인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거쳐야 했다. 그 시대의 시작을 알린 대표적인 자료가 바로 ‘5.16군사혁명’ 기념우표이다. 이 우표는 처음부터 국민과 해외에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알리고 홍보한다는 목표로 군사정변 이후 한 달 뒤인 6월 16일에 발행되었다. 당시 군인 출신인 배덕진 체신부 장관의 명령으로 불과 10일 만에 우정국 실무진과 조폐공사 직원들이 피를 말려가며 발행한 이 우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빠른 처리속도로 탄생한 기념우표였다. 이후 우리나라의 우표에는 군인과 군 관련 행사들을 기념하는 우표들이 수시로 발행되었다. 대표적으로 ‘5.16혁명 제1주년’, ‘9.28수도탈환 제15주년’, ‘예비군의 날 기념’, ‘재향군인의 날 기념’... 등등 박정희가 5.16군사정변 때 혁명공약으로 내건 반공, 경제개발과 관련된 주제보다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념우표가 더 빈번하게 발행되었다. [그림 2] 5.16 군사혁명 기념 우표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 우표에 자주 등장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기념우표뿐 아니라 보통우표에도 초상이 들어간 대통령이며 전두환 대통령에 뒤이어 우리나라 우표에서 2번째로 빈번하게 등장한 인물이다. 한국 우표에 3번째로 많이 등장한 세종대왕은 역대 11종의 우표에 등장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이 들어간 우표는 22종이나 발행되었다. 참고로 이승만 대통령은 그 뒤를 이어 9종의 우표에 등장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은 7년의 재임 기간에 무려 30종의 우표에 등장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기간인 16년에 반도 안 되는 기간에 이렇게 우표에 그가 자주 등장한 이유는 처음에 투표로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국민의 선택으로 당선된 인물이 아니었기에 1980년에 집권한 직후부터 대규모 행사나 퍼레이드, 운동 경기 등을 적극 동원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동시에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리시켰다. 우표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한 홍보성 기념우표들은 거의 전단지 수준으로 많이 발행되어 마침 유행하던 우표수집 붐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판매되었다. 그래서인지 이때 발행된 전두환 기념우표들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액면가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때 우표를 투자의 대상으로 사 모은 사람들은 결국 돈 주고 전단지를 모은 꼴이 된 것이다. [그림 3] 12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 프로파간다와 외화벌이를 한번에? 전두환 정권 이후 대통령이 우표에 등장하는 경우는 취임기념우표와 같이 특정한 경우로 한정되었고 우표를 통한 정부의 프로파간다도 그 정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는 우표가 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특히 과거 공산권 국가들은 프로파간다적인 요소가 다분한 우표들을 대량으로 발행하여 외국의 우표상들에 헐값으로 팔아 선전도 하고 외화도 버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렇게 우표를 외화벌이 수단으로 대량 발행하는 국가들을 ‘우표남발국’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악명 높은 곳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이미 1970년대부터 우표를 외화벌이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얼마나 많은 우표가 발행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우표 수집가들도 공식적인 발행량은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이다. 북한은 한국보다 훨씬 다양한 우표를 빈번하게 발행했는데 대부분 조선노동당의 선전, 선동 목적이 다분한 우표들이다. 이 우표들을 제외하면 거의 해외수출용으로 발행된 우표들로 해외의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 등을 무조건 끌어와서 담은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북한이 영국과 국교를 맺기도 전에 발행된 다이애나비 기념우표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우표들은 보통 수십 톤 단위로 발행되어 해외에 헐값에 풀렸기 때문에 적어도 50년 전에 발행된 희소한 우표가 아니면 전단지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 별로 없다. 북한 우표에서 김일성은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인 1946년에 발행된 ‘8.15해방 1주년’기념우표에서부터 등장한다. 이후 김일성은 북한에서 발행한 우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인물이 되어 1994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우표에 등장하였다. 김정일은 1987년에 발행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기념우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김정일이 우표에 전면 등장하기 2년 전인 1985년에 이미 ‘백두산의 비밀 캠프(밀영)’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이곳은 북한이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출생지라 선전하는 곳으로 사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세습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곳이다. 이는 북한이 이전부터 수많은 ‘혁명사적지’들을 기념우표에 담아 발행했음에도 이 밀영이란 곳은 매우 뒤늦은 198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우표에 등장시켰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듯 북한에서 우표는 세습의 밑밥을 깔아두는 정치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우표라는 이름의 작은 전단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고 말했다. 물론 우표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동시에 왜곡된 정보를 배우게 될 가능성도 생각보다 크다. 우표에는 언제나 그 우표를 발행한 국가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만 담긴다. 당장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국의 우표 수집을 권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 이미지들은 때때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왜곡된 정보를 담기도 한다. 만약 우표만 보고 그 우표를 발행한 국가를 이해한다면 그 어떤 국가에서도 부정적인 면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그 시기에 발행된 우표를 동시에 들여다보면 역사를 더 다양한 차원에서 바라볼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표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성을 내포한 전단지이며 역사의 이면을 들춰보는 좋은 단서가 되어줄 것이다.
제 2 호 ‘비효율의 세계’
정기자 주유라 loveura00@naver.com 우리는 효율의 세계에 살고 있다. ‘효율(效率)’이란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이다. ‘효율-적(效率的)’이란 ‘들인 노력에 비하여 얻는 결과가 큰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비효율의 세계는 큰 이익이나 눈에 띄는 결과를 얻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비효율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효율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효율의 세계란 마음이 따르는 곳을 향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학창 시절 효율적인 학업 생활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 대입이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도 이제 조금 한숨 돌려볼까하는 마음 한켠에는 불안감이 싹튼다. 대학에 들어와도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효율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효율의 세계 안에서 중요한 것은 보람이 아닌 편리함과 실리이다. 우리는 효율의 세계에 익숙하다. 관심이 가는 수업보다는 학점이 잘 나온다는 수업을 택한 적이 있는가? 배우고 싶은 것을 미루고 컴활(컴퓨터활용능력 자격시험)이나 토익 강의를 결제한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효율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효율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마음이 따르는 곳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비효율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빌어 쓸모없는 세상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여름 생일날, 친구들은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다양한 프렌차이즈의 기프티콘을 선물했다. 이제는 관례처럼 굳어진 기프티콘 선물은 편리하다. 밋밋한 생일 축하에 성의를 담을 수 있으며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료와 간식, 심지어는 비싼 과일이나 고급 한우까지, 무엇이든 클릭 몇 번이면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기프티콘과 채팅만으로 쉽게 마음을 전할 수 있으니 우리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한다. 카카오톡, 네이버 등은 선물의 모든 과정을 현대인의 삶에 맞춰 점차 간소화하고 있다. 심지어는 잘나가는 선물을 나이대에 맞게 추천해주니, 이보다 간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쓴 손편지와 얼굴을 마주 보고 건네는 선물이 그리운 까닭은 무엇일까? 얼굴을 마주보고 건네는 손편지와 선물은 기프티콘이 흉내 낼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 소중한 특성 중 첫째는 바로 시간이다. 가벼운 채팅 메시지와 함께 기프티콘을 보내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마음에 드는 편지지와 적당한 볼펜을 골라 책상에 앉을 필요가 없다. 또박또박 바른 글씨체를 쓰려 노력할 일도 없다. 선물을 사러 갈 필요도, 직접 포장할 필요도, 얼굴을 마주 보고 건네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선물 하나를 직접 전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물이 지닌 시간이다. 둘째 특성은 의미이다.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의미를 선물할 수 있다. 내게는 잊히지 않는 선물이 있다. 통에 담긴 아몬드이다. 아몬드 선물을 받은 나는 그것이 건강이나 시력을 위해서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의미가 담긴 아몬드였기 때문이다. 아몬드 선물은 같이 읽었던 책의 캐슈넛 선물을 흉내 낸 것이었다. ‘사생활의 천재들’이라는 책의 한 부분에서 작가는 친구에게 캐슈넛을 선물한다. 작가는 존 버거의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의 한 문장을 인용하며 캐슈넛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사이에 깨문 이 희망들이 넝마인지 새것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밤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새로운 날을 꿈꾸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커피 좀 있나요?” 인용을 마친 작가는 친구에게 말한다. “이 사이에 깨문 희망.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너에게 캐슈넛을 선물해. 네가 밤을 이겨내고 살아남길 바래. 바로 그것 때문에 캐슈넛을 선물해. 네가 피로 가운데서도 너를 확장하길 원해. 바로 그것 때문에 캐슈넛을 선물해. 네가 희망 때문에 생각의 틀을 바꾸길 바래. 그것 때문에 캐슈넛을 선물해. 캐슈넛을 입에 넣고 깨물 때마다 희망을 깨문다고 생각하기를 바래.” 아몬드보다 중요한 것은 아몬드 안에 담긴 의미였다. 상대방은 내게 아몬드를 주었지만 내가 받은 것은 캐슈넛이 될 수도 있었고 동시에 ‘이 사이에 깨문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선물을 통해 시간과 의미를 주고받아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기꺼이 비효율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하고 싶은 의미가 있음을 말이다. 선물에 시간과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까닭은 직접 건네는 선물이 지닌 물성 덕분이다. 선물에는 건네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다. 효율의 세계에서 물성은 환영받기 어렵다. 자리를 차지하거나 유용한 쓸모도 없으니 말이다. 반면 비효율의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성에 열광한다. 그들은 물성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감정의 물성>, 허블, 2019, 205쪽 물성을 지닌 것은 선물만이 아니다.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쓸모있는 물건인지보다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이나 의미가 중요해진다. 얼마 전 나는 지우개를 샀다. 하지만 결코 지우개로 사용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화가의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다. 내 주변에도 수집가가 둘이나 있다. 그들은 만년필이나 우표를 모은다. 그들이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그것들을 용도에 맞게 쓸 때가 아닌 그저 바라볼 때일 것이다. 물건을 수집하고 어루만지는 마음에 효율이나 계산이 끼어들 틈은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을 것 같아’, ‘그냥 좋으니까!’ 이렇게 단순한 마음 안에는 씨앗처럼 단단한 힘이 있다. 비효율의 세계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들인 노력에 비해 큰 결과를 얻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 마케터 김규림은 10년간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다. ‘목요일의 글쓰기’를 시작하고서는 3년 동안 190회가 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계정 ‘6DP’에는 주 6일 정성껏 밑줄그은 종이신문 몇 장이 올라온다.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와닿은 종이신문 기사를 갈무리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탕의 화려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선택지에 솔깃하지 않는다. 단숨에 어마어마한 결과를 바라는 효율의 세계는 잠시 내려놓는다.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건너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말은 아직 내가 하지 못한 말이다. -‘파라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1945년 9월 24일’ 우리를 잡았다. 우리를 감옥에 넣었다. 나를 벽 안으로 너를 벽 밖으로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알면서, 모르면서 자기 안에 감옥을 품고 사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들이. -‘파라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1945년 9월 26일’ 나짐 히크멧, 이난아 옮김.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재인용 효율을 벗어난 세계에서 효율보다 중요한 가치는 보람이다. 보람이란 ‘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좋은 결과나 만족감. 또는 자랑스러움이나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일의 가치’이다. 비효율의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보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달리는 사람이 승자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효율의 세계를 택하는 것이 항상 정답일까? 효율만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 안에는 감옥이 들어선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효율의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이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비효율의 세계에서 마음이 보내는 소리를 꼭 붙잡는 것이다. 원하는 것, 마음이 끌리는 것을 택해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거나 대단할 필요는 없다. 비효율의 세계는 엉망진창의 결과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환영할 것이다.
제 2 호 불안 속의 자하 고개
편집장 임지혁 201710846@sangmyung.kr 하루는 신발에 몸을 맡기고는 자하의 언덕을 걸어 오른다. 자동차들은 바로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눈앞에 보이는 차도와 인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급격한 경사길을 오르는 것으로도 숨차지만 오늘도 무사히 등교하기 위해서는 발길을 조심해야만 한다. 하루는 자동차에 몸을 맡기고 자하의 언덕을 오른다. 사람들은 차의 바로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차도와 인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급격한 경사길에서의 안전 운전을 위해서 엔진 브레이크 조작은 필수이다. 필자는 지난 주말에 학교에 올랐다. 하루는 직접 걸어서, 그리고 다른 하루는 자동차와 함께였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직접 걸어 올라가도, 혹은 차를 타고 올라가도 사람들의 안전은 위협받았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첫 날, 걸어서 올라가면서는 필자의 바로 옆으로 커다란 버스와 자동차들이 지나간다는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였다. ‘만약 내가 걸어가다 넘어진다면 과연 차에 치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저 차는 나를 치지 않고 지나갈까?’, 그런 두려움으로 정신을 재촉해야만 했다. 종종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는 곳도 있지만 그마저도 약하디 약한 철제 구조물이 스스로만을 지탱할 뿐이며, 언덕 밑의 새검정 교차로에서 캠퍼스 건물까지 차도를 밟지 않고 걸어가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어떨까? 기본적으로는 오르내리면서 큰 불편함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경차였지만 엑셀을 깊숙히 밟으면 언덕을 오르는 데 문제가 없었고, 엔진브레이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언덕을 내리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평일일 때, 그리고 등교가 다시 시작될 때에 우리 상명대 학우들, 그리고 사범대학 부속 학교들의 학생들이 등/하교한다면 어떠했을까?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는 그 길에서 과연 차를 능숙하게 조작해서 무사히 등교할 수 있을까? 혹자는 학교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사진1] 2021년 마을버스 종로 08번 사고 장면 지난 2021년 5월에는 정류장에 정차했던 서대문 8번 마을버스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버스 내부에 승객이 있었고, 충돌하였던 카페도 정상 영업 중이었으므로 아찔한 상황이었다. 혹은 이러한 사고가 발생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비가 오는 날, 혹은 눈이 오는 날에는 언덕길의 버스와 자동차들이 헛바퀴를 굴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의 비율로 중대한 사고, 작은 사고와 사소한 사고가 발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사도 높은 언덕에 학교가 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덕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는 언젠가 큰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작은 노력들을 오늘 찾아보고자 한다. 차도 인도의 명확한 분리 현재의 정문 등굣길은 인도와 차도가 복잡하게 얽힌 구조이다. 예를 들어 제2공학관 방향에서 최대한 인도를 이용해 등교하고자 한다면 부속 초등학교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뒤 경사를 오르다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를 피해서 캠퍼스에 진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의 등굣길은 비효율적이기도 하다. 차도의 좌우 양쪽으로 인도가 비연속적으로 위치하므로 정작 인도 하나의 면적이 협소해지는 우려가 있다. 그리고 협소해짐과 동시에 차도와의 구분이 명확해지지 않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언덕을 오르는 방향의 오른쪽, 문구점과 인쇄소 방면은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으며 그사이에 자동차가 정차된 현황이다. 만약 인도를 하나로 합치고, 인도를 확충한다면 차도와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덕에서의 구간단속 우리 학교의 정문 쪽의 언덕은 어린이보호구역이다. 30km/h로 차량 운행 속도가 제한되며, 실제로 언덕을 내려가는 방향으로 과속 단속 카메라가 위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속 단속 카메라가 무용지물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언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다 카메라 앞, 과속 여부를 판단하는 루프 센서에서만 30km/h의 속도로 감속하는 일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휴일일수록 더더욱 심하다. 이러한 위험은 구간단속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버스 정류장 부근에, 그리고 언덕이 끝나는 세검정 교차로 부근에 단속 카메라를 설치하여서 폐색 구간에 대해 평균 30km/h를 초과하는 속도로 주행한다면 단속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간단속을 통해 구간 내 평균 속도를 낮추고, 과속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버스 정류장의 평탄화 일반적으로 차량이 주차할 때 가장 위험한 곳은 경사진 곳이다. 그래서 운전 교습 시에는 자동 면허는 주차 브레이크를 단단히 체결하여서, 그리고 수동 면허는 여기에 더해 별도의 기어 조작으로 언덕에 주차된 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막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평지에 주차하는 것이다. 상명대학교의 교내 주차장은 모두 안전하고 평탄한 곳에 위치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존재한다. 바로 버스 정류장이다. 시내버스 7016이나 마을버스 종로 08의 경우 교내 정류장이 종점이므로 학교에 5분가량 정차하게 된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5분은 정차와 주차를 구분짓는 시간이기도 하므로 어쩌면 버스 정류장은 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류장은 평지가 아니고, 실제로 상술하였던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교내에서 가장 위험한 주차장인 것이다. 비록 우리들의 캠퍼스를 평탄화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조금만 노력한다면, 버스 정류장 만큼은 어쩌면 평탄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의 부지가 넓지는 않지만 버스가 안전하게 멈춰있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쉽지 않다.’ 위의 이야기를 꺼내자 모 관계자가 꺼낸 말이다. 비용 문제로나, 혹은 법적인 문제로 어렵다는 논지였다. 그렇지만 하나둘 이야기를 꺼낸다면 어떨까? 학생의 시각에서, 그리고 교수자의 시각에서, 교직원의 시각에서 언덕을 바라보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우리들의 지혜가 모여 새로운 작은 원동력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천천히, 하나둘 진보하면서 언젠가는 마음 편히 언덕을 오를 수 있는 날이 되지 않을까?
제 2 호 대학생들의 수면습관에 따른 몸의 변화
정기자 서영훈 seoyh120@naver.com 1. 수면의 중요성 청년취업난이 극심한 시대에 각자 본인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시기로 넘어가는 대학생들이 겪고 있는 현 실정은 각종 고민과 스트레스가 급증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생이 자각하는 생활 스트레스는 경제적 스트레스(29.1%), 성적(26.4%), 취업(24.7%), 이성 관계(8.4%)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각종 스트레스는 종종 수면의 양적 부분인 수면시간과 질적 부분인 수면의 질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하는 불규칙한 수면습관은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생산성을 저하하고, 대인관계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고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은 수면장애 그 자체로도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불안, 집중력 감소, 수면장애 등으로 인한 또 다른 질병에 이환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기본욕구로 활력을 회복하는 수단이 되는 수면을 적당히 취하지 못하면 에너지와 활력을 잃게 된다고 하였고 수면이 불안, 우울, 스트레스 등 정신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2. 아침형 인간 vs 저녁형 인간 두 집단을 비교한 결과, 아침 활동형 집단의 경우 취침 시각은 12시 48분이고 기상 시각은 7시 30분이었고, 저녁 활동형은 취침 시각이 2시 06분 기상 시각이 9시 11분이며, 수면의 양에서는 두 집단 모두 약 6시간 30분으로 집단 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잠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저녁 활동에서 더 길었고 전반적인 수면의 질도 떨어져서 일반적인 수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저녁 활동형은 아침 활동형에 비해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대학 생활의 부적응 정도가 심했다. 즉, 저녁 활동형의 정도가 심할수록 자신감이 부족하고 심신의 건강 상태는 좋지 못하며 주의집중력은 떨어졌다. 반면에 아침 활동형일수록 대학 생활에 만족감과 에너지 및 동기 수준이 높았고 가족 및 사회적 관계가 잘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에서의 적응의 주요 지표인 학업 성취도를 알아보기 위해 총 이수 과목의 평균 학점을 비교했을 때 저녁 활동형의 평균학점이 낮았다. 저녁 활동형이 아침 활동형보다 수면의 질, 심리 행동상의 건강, 대학 생활의 적응 및 학업 수행 등에서 뒤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아침 활동형은 사회, 물리적 환경에서 요구하는 활동 시간대와 자신의 생체 시계에 설정된 활동 시간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저녁 활동형의 경우에는 자신의 수면 일주기 리듬과 일상적으로 부과된 사회적 스케줄 간의 불일치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저녁 활동형은 사회 활동에서 요구하는 기상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수면 리듬에 비해 일찍 잠을 자려고 해도 쉽게 잠들기 힘들고, 이에 따라 수면의 양과 질이 떨어지게 된다. 특히 이들은 주말에 장시간 수면을 취함으로써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말의 늘어난 수면시간과 늦은 기상은 수면 리듬을 무너지게 만든다. 이는 주말 저녁 취침 시간을 더욱 늦어지게 하고 월요일의 기상을 더욱더 힘들게 하여 주중의 피곤을 가중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따라서 아침 활동형에 비해 특히 오전에 경험으로나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더 졸릴 수밖에 없다. 또한 기상 직후 잠에서 덜 깨어난 채 일시적으로 멍한 상태를 경험하는 수면 무력증이 아침 활동형에 비해 길어서 오전 시간의 과제 수행에서 불리하게 된다. 이처럼 저녁 활동형은 자신의 생체 시간과 사회, 환경적 시간 간의 불일치로 자신의 생리적 리듬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는다. 이런 스트레스는 정서적, 행동적, 사회적 부적응과 학업상의 수행을 방해할 수 있다. 저녁 활동형은 학업 성취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저녁 활동형은 자신의 수면 리듬에 비해 일찍 시작되는 강의 또는 시험 시간은 개인의 생리적 또는 기민성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보다 이르기 때문이다. 3. 학과 및 학년 간 수면의 질 변화 대학생들의 수면시간을 살펴보면 취침 시작 시각이 평균적으로 24.39시였고, 기상 시간이 7.65시 정도에 실제 수면시간이 6.91시간 정도였다. 또한 수면 지연시간이 평균 22.64분으로 전체적으로 양호하였다. 학과에 따라서는 비교적 유사한 학과계열인 인문, 사범, 사회 등의 학과계열들은 수면의 질 점수의 평균이 비슷하며 별 차이가 없었으나 공학과 예체능의 학과계열에서 좋지 못한 수면의 질을 보여주었다. 이를 스트레스와 연관 지어 보았을 때 스트레스를 매우 받는다고 응답한 대학생이 예능계열이 37.0%로 자연 공학 계열 17.1%, 인문사회계열이 16.1%보다 월등히 높았다고 결과를 얻었으며, 공학과 예체능 계열의 대학생들은 학과 특성상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수면의 질이 좋지 않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학년 간에는 1학년 < 2학년 < 3학년 < 4학년으로 학년이 높아질수록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수면의 질 점수가 높아져 가고 있다. 이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 등 진로 스트레스가 학년이 높아질수록 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고한 것을 연계해서 보면 학년이 높아질수록 진로 스트레스로 인해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4. 수면 질과 생활패턴의 연관성 흡연, 음주, 카페인 섭취 등 생활패턴도 수면의 질과 연관이 있다. 대학생들의 생활습관과 수면의 질의 경우에는 흡연을 전혀 하지 않는 대학생들이 수면의 질이 좋았지만, 흡연하는 경우에는 수면의 질이 낮았다. 담배의 각종 화학물질이 당장은 기분을 좋게 하더라도 취침 시에 수면의 질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음주의 경우 전혀 마시지 않거나 가끔 마시는 경우는 수면의 질이 좋았으나, 매일 마신다고 응답한 대상자가 수면의 질 점수가 매우 좋지 않게 나타났다. 매일 음주하는 것은 취기에 빨리 잠드는 것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정작 수면 상태에 돌입하였을 때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커피 섭취의 경우도 음주와 유사한 결과를 보였는데 가끔 한 번씩 마시는 것은 수면의 질이 나빠지지 않았지만 매일 마시게 될 경우 수면의 질이 좋지 않게 나타났다. 이는 카페인 음료를 가끔 섭취하는 것보다 매일 섭취할 경우 신체 내의 카페인 분해속도가 카페인의 유입량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육류섭취, 과채류 섭취, 아침 식사에 관해서는 각 빈도별로 통계적 유의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육류섭취와 과채류 섭취, 아침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대학생들만이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양 상태가 불충분할 경우에도 수면의 질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간식 섭취와 운동 빈도는 수면의 질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낮잠 취침의 경우에는 매일 낮잠을 자거나 평소에 낮잠을 자주 자는 경우 야간의 수면의 질이 좋지 않게 나타났다. 5. 우리는 적절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에 부합하기 위해서 많은 시험 및 과제에 짓눌려 있다.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개인의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자신의 마음과 몸이 스스로 얼마나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수면의 진정한 이점을 간과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삶의 스트레스와 압박은 축적되어 삶의 질을 떨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양질의 수면을 통해 삶을 활기차게 하고, 마음과 몸과 영혼을 재건하여 최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적절한 수면은 우리가 당면하는 스트레스와 압박 같은 문제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제 2 호 대리만족, 현대인이 만족감을 느끼는 방법
정기자 장아현 ahyeon_1230@naver.com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에서 더 나아가 영상, 책, 사진 등의 창작물로부터도 많은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타인이 자신의 내적 욕구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투영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만족감을 얻어낸다. 바로 이것을 “대리만족”이라고 한다. 여기서 대리만족이란 타인의 성공으로부터, 또는 원래의 목적과 다른 목적으로부터 얻는 만족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만족하기 위해 행동하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기 위해서는 만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와 ‘나’의 환경에 만족하기 위해 스스로의 내적 욕구와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만족의 감정을 타인의 성취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올해 우리를 가슴 졸이고 손뼉 치게 하며 열광시킨 것이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메달 순위 16위로 막을 내린 제32회 도쿄 올림픽이다. 사람들은 국가대표 선수가 자신의 종목에서 승리하였을 때 큰 희열을 느낀다. 그들을 응원하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답답해하고 가슴을 졸이고, 또 즐거워한다. 이러한 올림픽 과정 안에도 현대인들의 대리만족 심리가 깊숙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선전과 투혼을 바라보고 있자면 큰 짜릿함이 느껴진다. 이번 도쿄 올림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왔으며, 갖가지의 상황 속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환호와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의 행보는 팬데믹 시대 속 지친 국민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대리만족의 심리가 반영되어 사람들은 그들에게 공감하며 함께 즐겼기 때문이다. 대리만족의 시대 대리만족을 통한 사회현상은 본질은 같지만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자녀를 통한 부모의 목표 실현 욕구가 그의 예이다. 가까운 타인에게 자신의 목표 성취를 대입하려는 심리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원래 목적과 다른 목적 성취에서 얻을 수 있는 대리만족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욕구 만족을 위해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목표 성취를 강요하는 순간, 자녀와 부모 그 누구도 진정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욕구를 지닌 주체와 이를 실현 하고자 하는 주체 간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과한 교육열 역시 부모의 내적 욕구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대리만족의 양상이다. 대리만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유튜브”가 아닐까 싶다. 유튜브는 현대인들에게 대리만족 실현의 공간이 되어준다. 유튜브 시장이 확대되며 기존에 없던 다양한 콘텐츠들이 자리 잡았다. 자신의 여행 영상을 담아내는 사람, 반려동물 영상만을 올리는 사람, 일어날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일상을 보여주는 사람, 새로 구매한 명품의 포장을 뜯는 걸 보여주는 사람,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촬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식사하는 모습만을 찍어 올리는 사람도 있다. 여행, 반려동물, 타인의 일상 등이 담긴 영상을 보면 우리는 대리만족의 의미 그대로, 대신해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다양한 영상 중에서도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 일명 ‘먹방’은 유튜브 시장이 활성화 띄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이유에서 대리만족의 개념을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에 따르면 먹방 시청자 1,868명을 대상으로 시청 이유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간접 경험할 수 있어서가 39.7%, 보는 것만으로도 호강하는 느낌이 들어서가 25.7%,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러서가 14%의 응답을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외로움 해소와 재미 등의 응답이 존재하였다. 먹방을 통하여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식욕이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따라서 다른 부가적인 것들은 모두 제치고, 오로지 먹는 행위를 보는 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오직 먹는 장면만 올려달라는 요청 댓글이 먹방 영상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음식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반영된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온 대리만족의 형태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욕구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먹방을 통해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대리만족, 어디까지 누려야 할까? 뇌 속의 거울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가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가능하게 만든다. 다른 이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과 동일하게 반응하는 뉴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인 리촐라티 교수가 발견한 이 거울뉴런이 바로 우리가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리만족은 인간에게 이롭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제약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으며, 인간이 지닌 욕구를 간접적으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를 통해 일상 속에서 큰 부담 없이 간접체험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대리만족은 바쁜 일상 내의 휴식이며 행복이 되어준다. 하지만 이쯤에서 드는 의문점이 있다. 과연 대리만족으로 뒤덮인 일상이 마냥 좋은 것인가. 대리만족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리만족을 어디까지 누리는 것이 적절할지 고민을 해봐야만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602명을 대상으로 여가활동 설문조사를 한 결과, 60.8%의 응답자가 대리만족형 콘텐츠로 여가를 보낸다고 응답하였다. 이렇게 대리만족형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제약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현대인들에게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의 활력소 면에서는 직접 체험이 훨씬 유의미하다. 간접체험은 현장감 있는 경험을 하기에 한계가 있다. 어찌 보면 대리만족은 가상과 현실 사이쯤 위치한 이상으로부터 구현된 만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접체험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감각 둔감화’ 증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중 대리만족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대리만족으로 인한 현실의 잠식이다. 대리만족에 익숙해져 나의 목표를 돌보지 않고, 그의 성취에 힘쓰지 않는 것은 현실을 뒤로 하는 것이다. 현재 흐르고 있는 시간은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제 2 호 탈모 공약을 바라보는 2030세대의 변화
정기자 송지민 wmzmin2@naver.com # 정치권에 심어진 ‘탈모 공약’ 얼마 전 이재명 대선후보는 공식적으로 탈모 치료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고 공약하였다. 앞에서 다루었듯 탈모로 고통받는 2030세대는 생각보다 많기에 이번 ‘탈모 공약’은 청년층에게도 유효한 공약일 수 있다. 다만 이재명 후보의 탈모 공약은 전형적인 포퓰리즘 공약이란 비판이 상대 후보인 안철수 후보 측에서 나왔다. 안철수 후보 측은 탈모 치료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대신 탈모 치료제 복제약의 가격을 낮춰서 가격부담을 낮추겠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JTBC, 글로벌리서치 등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의 탈모 공약 찬반 비율은 오차범위 안에서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탈모 공약의 첨예한 찬반비율은 탈모에 대한 우려에도 자칫 대선 공약들이 포퓰리즘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확실한 점은 이재명 후보의 여러 공약 중 탈모 공약은 많은 관심과 논쟁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JTBC가 실시한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에 관한 찬반 여론조사는 2016년 이후 당사 최다 참여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탈모 공약은 탈모 인의 권리에 대한 논의를 촉진했다는 의의가 있다. 탈모는 모든 세대에서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으로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하지만 탈모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고 지속적인 탈모 치료제 복용이나 모발이식을 해야 하기에 평생에 걸쳐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즉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이 적용된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상당한 재정지출이 불가피하다. 탈모보다 치명적인 암이나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돌아갈 건강보험 혜택이 줄어들거나 최소한 건강보험료가 오를 것이기에 탈모 공약은 정치적 관점과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 탈모 인의 권리가 떠올랐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탈모 치료는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만큼 저소득 계층은 탈모 치료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탈모 치료를 단순 미용문제로 취급하는 것은 탈모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간과하는 생각일 수 있다. 특히 소득이 낮아서 탈모를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스트레스는 더욱 클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저소득층의 탈모 치료를 지원한다는 정책은 당장 실행하기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지속적으로 논의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는 앞으로도 정치권에서 나온 탈모 치료지원 공약들이 그저 포퓰리즘 공약인지 탈모 인을 위한 실현성 있는 공약인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이다. # 탈모와 그 미래 정치권에서의 탈모 공약은 탈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탈모는 직접적으로는 (당뇨 등의 질환과는 달리) 합병증 등 건강상의 위해를 미치지는 않고, 단지 개개인의 외관에 위해를 미칠 뿐이다. 그럼에도 탈모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단순히 ‘죽지 않을 수준’의 건강을 보장했던 건강보험이,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건강’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변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건강’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는 것이다. 기존의 건강의 개념으로 볼 때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일 것이다. 건강보험제도를 통해 합리적인 가격의, 그리고 수준급의 의료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건강의 개념으로 볼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매년 접하는 뉴스이지만 올해에도, 2021년 OECD국가들 가운데 한국의 자살율은 1위이며 행복지수는 37개국 가운데 35위라는 소식이다. 지금으로서는 탈모 공약이 성공적으로 이행될 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 건강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 사회가 추구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 2030세대의 탈이념화 사실 이번 탈모인 지원 공약을 넘어서 후보들의 공약이 2030세대에게 역효과를 불러온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기본소득공약과 탈원전 공약을 들 수 있다.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에게 국가가 무상으로 기본적인 소득을 제공하는 제도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 경우에 기본소득이 실현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직 청년층은 기본소득이 실현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대신 기본소득으로 인한 세수 부담이 온전히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우려한다. 탈원전 공약은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점차 줄여나갈 필요가 있겠지만 이 역시 청년층에게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강하며 탈원전 정책이 급격한 전기료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본소득과 탈원전 정책이 청년층에게는 특정한 이념 공약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진보의 기조는 친환경주의, 불평등 감소, 정치적 올바름 등을 들 수 있다면 보수의 기조는 신자유주의, 시장과 기업에 친화적 제도, 능력 우선주의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청년층은 과거 586세대와 달리 상당히 탈이념화 되었기에 특정 이념의 성향을 드러나는 공약보다 자신들에게 무엇이 이득인지를 더 따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윤석열 후보가 들고나온 여가부(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에 호응하는 20대 남성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탈이념화에 따른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청년층은 현 정부가 이념적 잣대로 젠더 정책을 세웠다고 본다. 그 반대급부로 여가부 폐지라는 극단적 공약이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넘어 2030세대의 탈이념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계속 헛다리를 짚을 가능성이 높다. # 2030세대는 변하고 있다 이번 대선은 기존의 어떤 대선보다 2030청년층이 주목받고 있다. 왜냐하면 2030세대는 거의 언제나 진보적 후보를 지지한다고 여겨졌기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청년층이 보수 후보를 지지하는 이변을 보이면서 과거의 고정관념이 깨졌다. 이는 지속적인 경제 불황과 점점 심화되는 경쟁 사회에서 파편화되고 개인주의화 된 청년층이 적극적으로 탈이념화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층은 이번 대선뿐 아니라 다음 선거에도 이념에 따라서가 아닌 자신을 존중한다고 여기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2030세대는 진보에 대한 기대감보다 자신에게 무엇이 더 유리할지를 계산할 줄 아는 세대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제 1 호 [자하교지의 역사-1980년대] 빛바랜 80년도 교지의 빛
오지윤 정기자 1.1980 년대 자하와의 조우 한자로 시작된 표지에서부터, 세월에 변색된 종이는 80년대 교지가 나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역사를 겪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 30 년도 더 된 교지를 펼쳐 보면 그 당시 선배들의 정신과 한국의 역사적 이슈가 상명인의 관점에서 담겨있다. 이 중에서 80년대 교지는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시기에 쓰인 만큼 인상적인 글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이 시대의 교지는 자하 교지 편집부의 선배들이 직접 창작 한 시, 소설, 수필, 평론 등과 같은 문학 작품이 "자하 문단"안에 기록돼 있다. 그만큼 그 시대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미래의 문학도를 꿈꾸고, 문학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는 걸 알 수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주제도 자주 등장한다. 1965년 개교 당시 '상명 여자 사범 대학'으로 시작하여 1996 년에 비로소 현재 남녀 공학인 상명대학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여성에 대한 관심과 고찰이 이해되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해보아야 하는 주제는 그 당시 한국의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있던 청년들과 경제발전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다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 밖에도 교수님의 서평과 대학생들의 고민을 담은 다양한 주제가 담긴 내용은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이 기대되는 탄탄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2. 제 13 호 (1981 년) 먼저 1981년도 교지는 이 기사에서 다룰 교지 중에 가장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꽃을 메카로 세련된 표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포토에세이에 서부터 취재 기사, 한국의 예술, 한국의 종교, 그리고 자하 문단까지 인문학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내용을 담고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는 부업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취재한 기사인 "대학생 부업의 현상과 문제점"이었다. 현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하는 것처럼 이들도 부업을 했었는데, 직종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현 대학생들은 학원이나 과외, 편의점 등과 같은 일을 한다면, 당시에는 대학생 사이에서 과외 금지 조처로 인해 학습지와 같은 시험 문제지의 수요가 늘어나 학습지 배달과 같은 일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 밖에도 보험 가입 확장 요원과 같은 영업직, 무역 회사원, 인구 시장 조사 요원, 외국 구매자를 위한 연주 서비스 요원, 개인 회사 사장 비서, 그리고 미대생의 경우 의류 디자이너와 같이 현재 대다수의 대학생이 졸업 한 후 뛰어 든 취업전선에서 비로소 경험할만한 일을 이미 하고 있었다. 사회 초년생도 견디기 힘들 수 있는 일들을 이 당시 대학생들은 부업으로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 정치적 사건이 우리에게 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생활에 와 닿는 변화라는 것을 느꼈다. 3. 제 14 호, 16 호 (1982 년, 1984 년) 1982년도의 교지는 "현대 여성의 가능성"과 "한국교육"이라는 두 개의 큰 주제로 이루어져 잇다. 그중에서도 진로에 대한 내용을 다룬 "현대 여성의 가능성" 부분이 인상 깊었으며 당시 사회에 나가 있던 선배들의 직업에 대해 알아보고, 필요한 역량과 같은 조건들을 취재한 기사와 교수님들의 서평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과거 본 대학이 사범대학이었던 만큼 교직으로 진출한 선배들이 많았고, 그 직업군으로는 교사, 교수, 사서, 비서, PD, 영양사, 연구원, 출판사 직원, 공무원, 화실경영 등 현재에도 많은 이들이 꿈꾸는 직업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문학이다. 교지 안의 기억에 남는 문학 작품 중에 1984년도 교지 안에 수록된 시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세검정"이라는 제목의, 당시 국어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선배님이 쓰신 시다. 세검정 민영흥/국어과 3학년 1 곳곳에는 가슴 허물린 절벽 오르기 힘든 곳이 아니라 오르고도 즐거움을 거부하더니 어느 가지 치는 날 솎아진 잎사귀되어 메달리게 되었다. 산등성이 목덜미를 발등으로 찍어대는 여린 살냄세 피로한 날냄세들이, 그렇게 쉽사리 서로의 비림을 용서하지 못하여 산동네 빗줄기는 더욱 굵고 산동네 눈밭은 더욱 두꺼워 우리는 더욱 아프게 맞는다. 2 되돌아 보면 멀미가 나는 시간의 모서리에서 뒤늦은 현기증은 질펀한 세상을 토해내고 차리리 고독한 공허이기를 차라리 손시린 외면이기를 하여묻어도 사람은 말이 없고 할 수 없었다. 하느님이 이브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에도 할미가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난 때에도 비명 아니면 눈물 아니면 피라도 뿌리며 꿈틀대고자 했던 것은 3 우리들 돌팔매질 봄가을 휘어돌아 샛길이 한길되더니 어느날 성황당 돌기둥이 보인다. 천둥 번개가 하늘벽을 허물어 때리면 용이다. 낡은 실밥 두툼한 가랭이에서 아픔 다하도록 허물깎아 내더니 그것은 무에서의 새로운 모둠이 아닌 네 안에서의 깨달음이었다. 이 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이유는 매번 세검정을 지나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상명인들의 공감을 자아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그 문학적 감성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보고 몇 년 전 학교 축제에서 글짓기 대회를 열었을 때 입상했던 동문의 짧은 시가 떠올랐다. 언덕 지각이야 뛰고 싶니? 정신차려 "상명대"야 Frozen Duck 언 덕 Frozen Duck 그 당시 '언덕'시가 1 등이었고, 'Frozen Duck'이 2 등을 수상했다. 둘 다 무릎을 탁 치게 하고 웃음 짓게 되는 글이다. 흥미로운 건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시들보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글이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는 사실이다. 현대는 이처럼 재밌고 쉽게 읽히는 문학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현시대의 유머와 예전 문학작품의 감성, 둘 다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4.17 호 -22 호 (1985 년 -1990 년) 지금까지 문학과 여성, 다양한 주제의 서평을 다루었던 1981년부터 1984년도 교지까지 살펴 보았다면 이와 반대로 1985년에서 1990년도 까지의 교지부터는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주제들이 주를 이루었다. 문화로 본 한일 관계, 식민주의와 주체성 확립, 분단과 통일, 한국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내용이 다루어졌고, 이 중에서도 1987년도 교지에 실려 있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사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다. 이 기사는 이 시기에 서구국가 제도가 한국에 들어오고, 독립 이후 맞닥뜨린 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정부의 통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당시 경제성장의 상황이 쉽게 그려졌다. GNP 성장 중심의 개발전략으로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지만 극심한 소득 불균형과 높은 외자 의존도 등과 같은 문제점이 남아있었다. 이 기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장기적인 경제정책과 경제 운용에 있어서 민간주도형으로의 변화, 인간 자본 축적에 관심을 돌려 경제자립을 하는 것을 꼽았다. 이후 실제로 이루어진 해결법들이기에 저자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졌고 의미 있는 기사였다. 5.소감 이 당시 교지들에 특징 중에 신기했던 것은 교지편집부원들의 글보다는 교수님, 다른 대학교 학생,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투고한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우리 또한 투고를 받고 있지만, 이 시대 교지에서 받은 만큼의 많은 투고는 받지 않는다. 이것은 교수신문사 기자 캠프에서 만난 타 대학교의 교지 편집부원들에게 들어봐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현재 대학교의 교지편집부는 문학과 수필 중심이었던 과거와 달리 조금 더 실용적이고 정보를 포함하는 글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종이책이 아닌 웹진으로, 매체도 변하고 있다. 이렇게 변하고 있는 현재 추세와 과거 모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사를 쓰며 이를 확실히 느꼈다. 또한 한 가지 더 느낀 점은이 당시 대학생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과 성장을 해왔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들도 취업과 진로 문제로 치열한 청춘을 보내고,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구조적인 문제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지금의 기성세대다. 현재 우리나라는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혐오 문제 등과 같은 사안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갈등을 맺고있다. 이러한 세대 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우리는 같은 문제를 가진 공동체라는 인식이다. 이를 위해선 서로의 시대적 배경과 공유되는 문화, 당시 사회적 인식과 같은 맥락을 알려고 하고, 이에 기초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자하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어느 순간 이어져왔던 마음속의 차별의 고리를 조금이나마 끊어주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서로 한 걸음 씩만 더, 열린 마음을 가지면 해결될 수 있는, 어쩌면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왜 제일 해결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러한 많은 고찰과 생각을 하게 해준 자하지만, 에너지도 많이 받았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 시대에서, 당시 사람들과 문화를 공유한 선배들의 글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기운이 느껴져 가슴이 벅찼다. 또한 상명대 학교 선배들의 노력이 있기에 지금의 교지 편집부가 있을 수 있었고,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약 30년이 지나 빛이 바랜 1980년대 자하 속의 빛나고 멋진 기사들을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
제 1 호 [자하교지의 역사-1970년대] 시작
편집장 정한희 1.70 년대 '상영 사대 (현 자하)와의 만남 자하의 첫 울음을 보았다. 속은 노랬고 투명한 작은 벌레도 글자 사이를 걸이 다니고 있었다. 한글과 한자가 뒤섞여 한 줄을 읽기 힘든 것이 흘러간 세월을 께닫게한다. '상명 사대'는 겉모습만 보고 외면하기에는 예쁜 구석이 많은 책이다. 한자로 써진 제목에서 복고풍이 솔솔 불어 온다. 투박하게 통으로 감싼 바닐포장도 나름 멋스럽다. 편집실 문 앞 책장에 트로피처럼 서있던 교지를 손에 쥐고 펼쳐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 먼저 상명의 언덕에서 지내 A들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차 올랐지 만 한편으로는 어떠를 깨 버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제는 역사책이되어 버린 '상명사대'는 어떤 것을 품고 있을까. 2. 자하의 겉 1965 년 상명여자고등기예학원이 상명 여자 사범 대학이라는 '대학'의 명칭을 얻은 지 4 년 만에 교지가 생겼다. 처음 교지의 제호는'상명사대'였으며 1965 년 배상명 학장님의 창간사로 시작한다. 상명사대는 지금의 자하와는 많은 점이 달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자의 사용이다. 지금이야 한자는 중의적이거나 생소한 단어의 뜻을 보충하고자 할 때 첨부하여 쓰이는 정도지만 70년대 당시 교지에는 한자를 모르면 한 문장도 알기 힘들 정도로 한자가 많이 섞여있다. 또한 문자를 세로로 나열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문장을 진행하는 한자 문화권의 특성도 보인다. 이 가운데 영어와 일어까지 섞여있으니 교지 한 권을 읽고 쓰기 위해서는 높은 지식 수준이 필요했을 것 같다. 복잡해 보이는 문장들과는 반대로 내지 디자인은 담백하다. 목차만 컬러로 코팅되어 있고 나머지는 부들부들한 종이에 글과 사진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다. 당시엔 이미지 파일을 찾고 사용하는 것이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그린 손 그림을 복사하여 첨부한 것이 많다. 그래서인지 더욱 정성스럽고 푸근하게 느껴져 집중이 잘 되었다. 내지 여백에는 동물이나 식물을 작게 그려 넣어 찾아 읽는 재미도 더했다. 사진으로 채워진 페이지도 있다. 창간호부터 목차 앞부분에는 학교 행사의 모습이나 캠퍼스 전경을 찍은 사진들을 배치했다. 덕분에 70년대 캠퍼스와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물로 가득한 지금의 캠퍼스와 달리 당시에는 건물과 강의실도 적고 심지어 포장되지 않은 길목도 보인다. 조금 더 자연친화적 인 캠퍼스였을까. 학교 행사를 기록한 사진에서는 한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1975년 개교 10주년 기념행사에는 남자는 양복, 여학생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항상 한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던 것은 아니며 중요하고 공식적인 자리에만 한복을 차려 입고 참석했다. 중등교육 세미나 장면에서는 현수막을 수기로 제작하여 걸어 놓은 것도 보인다. 지금은 자하제에 유명 연예인을 초청하여 공연을 보지만 70년대 자하제는 학생들이 직접 연극을하고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이끌며 즐겼다. 교내 사이클 대회를 열고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며 지덕체를 고루 함양하기위한 열정도 보인다. 지금은 생소한 학도 호국단의 모습도 담겨있다. 창간호부터 7호까지는 학생회가 교지 편집 위원을 꾸려 상명 사대를 제작했고 8호부터는 상명여자사범대 학교학도 호국단이 제작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8호부터는 학도 호국단과 집단적인 행사 모습이 많이 나온다. 학도 호국단에서 상명사대를 제작한 것이 교지의 언론 보도 자율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해 본다. 3. 자하의 속 70년대 상명 사대, 현 자하의 구성과 내용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상명사대는 몇 가지 고정적인 메뉴들이 있다. 교수 논단, 학생 논단, 자하 문단, 번역 소설, 특집 기사이다. 지금의 자하는 교지 편집부 원들이 작성한 기사가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학생회와 학도 호국단이 편집 위원이되어 재학생, 졸업생, 그리고 교수님들에게 원고를 청탁 받아 상명사대에 실었다. 제작의 주체를 학교 구성원들에게줌으로써 학생들의 고민과 감성, 그리고 일상을 더욱 생생하게 담아 내고있다. 상명 사대는 모두가 참여할 수있는 교지 였다는 것에 열린 언론으로서의 공정적인 의미도 갖는다. 학교 구성원들이 작성한 고정적인 메뉴들은 크게 학술 관련 글과 문학 관련 글로 나뉜다. 교수 논단은 학술적인 주제를 심도있게 다룬다. 사범 대학의 특성에 걸맞게 교육과 관련된 논평 기사가 주를 이루며 연구 논문을 실어 학술지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교수님들과 좌담회를 열고 내용을 기록한 글도 자주 보인다. 좌담회의 주제는 학술적인 내용이 많았고 사회적인 논점에 대해 토론 하기도한다. 여성을 주제로 한 좌담회가 눈에 띄었는데 양성이 사회적으로 평등한 사회, 여성 리더십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는 여성 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에 우리도 여자 사범 대학으로서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학생 논단은 자신의 전공에 대한 연구와 올바른 교육의 방향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70년대 대한민국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분위기를 풍긴다. 독재적인 군사 정권은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잃어버린 인권과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국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며 사회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바른 생각을하고 바른 것을 배우고 바른 사회로 이끌기 위해 학생들도 발 벗고 나섰다. 학생논단에서는 자주적인 이념을 확립하고 올바른 교육의 지표를 탐구하기 위한 고민들이 담겨져 있으며 새로운 역사 창조에도 관심을 나타낸다. 거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들은 문학적 감성을 놓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신이 창작한 시, 소설, 수필을 자하 문단에 실었다. 자하 문단은 교지의 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많았으며 문화, 음악, 미술 등 예술 감상문도 기록했다. 번역소설에는 일문과 영문으로 된 해외 유명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고 수록했다. '꽁트' 라는 메뉴도 잠시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비밀스러운 이야기들도 담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집 기사는 70년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다. 정치적인 문제는 비판적으로 꼬집은 글이 보이지 않지만 사회 문제도 원론적인 이야기에 그친다는 것이 아쉽기 만하다. 몇 호에 걸쳐 특집기사의 주제는 '현대'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비정상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전통적인 가치가 등한시되는 것을 보며 어떤 것을 지향해야하는지 고민한다. 6호의 특집 기사는'현대가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산업의 발전에만 치중하는 현실과 그로 인해 사라져가는 고향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드러나있어 인상적이다. 4. 소감 불안정한 사회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다짐과 우리가 가야할 곳에 대한 우직한 시선이 가득 담겨있는 상명사대는 오늘날의 언덕을 엄숙하게 만드는 책이다.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지금과 달리 국가적으로 언론의 내용을 검열하고 통제하던 당시에 상명사대가 얼마나 훌륭한 학술지이자 인기있는 문학지였는지 실감하게 된다. 선배들이 만들고자 했던 바른 세상에 우리는 얼마나 더 가까이 왔을까. 읽기도, 읽어도 힘든 70 년대의 상명 사대는 가슴 아픈 명저이다. - 한글보다 많은 한자 덕분에 같이 상명사대를 읽어주신 어머니와 아버지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 1 호 [자하교지의 역사-1990년대] 우리에서, 나 그리고 너로
이강현 명예기자 1.1990년대 자하와의 첫만남 그동안 '90년대'라고 하면 나와 내 또래 선후배들이 태어나던 시기이니 가까운 과거이지 않을까 생각됐다. 그래서 90년대 대학생들도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생각보다 90년대의 선배들은 오늘날의 대학생들과 다른 점이 정말 많았다. 오히려 90년대의 교지들을 읽다보니 우리의 문화나 가치관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었다. 2.1990년대 자하의 흐름 91년부터 93년(24호~27호)까지는 여전히 앞선 80년대 세대의 화두인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학생들은 단결하여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일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94년부터 96년(28호~30호)에는 우리가 들어본 'X세대'로 세대가 교체되며 혼란스러워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교지는 점차 단결과 투쟁보다는 개인의 권리, 다양성을 존중하고 추구하는 방향으로의 시대 이행을 보이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또 세계화를 위해 나아가려는 모습들이 교지에 실려 있다. 97년부터 98년(31호~32호)에는 정보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때문에 정보, 컴퓨터 등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또 실업 문제나 대학 구조 조정 등의 일들이 대두된다. 99년부터 00년대(33호~34호)에는 다양성은 물론이고 비주류문화, 소외된 외국인 노동자 등 세상의 사각지대까지 구석구석까지 시선이 닿는다. 목차 또한 다양성을 담으려는 듯 주제별로 나눠놓는 획기적인 구성을 이룬다. 3.24 호 -27 호 (1991년 -1993년) 이시기 교지의 모든 도입은 '시 (詩)'로 시작된다. 특히 박진관 시인의 <안개시대> 나 문병란 시인의 <최루탄 반가>, 정태춘 시인의 <아, 大韓民國>과 같이 현실을 비판 고발하고 민주화를위한 염원과 의지가 담긴 시들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의 교지는 목차들 중 공통적으로 '이구동성'과 '말 소리 함성 ', 또 '이론과 실천 '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구동성 '은 주로 사회적인 이슈나 기자들의 개인 체험 기사 위주로 쓰였단 것을 확인 할 수 있었고,'이론과 실천'은 당대 정권에 관한 기사들로, 또 '말 소리 함성'은 대학과 관련된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매 부 만화 코너가 존재하고 문화평 등의 예술 논평이 실려있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91년도 24호 자하의 '이구 동성'에는 지방 의회 선거, 언론의 기능, 선생님의 꿈, 각기 각층에 존재하는 '껍데기'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었다. 또 '말 소리 함성'에는 학원 민주화 투쟁과 사립 학교 법, 학생회 등에 관한 기사들이 있었고 이론과 실천에는 사회 성격론과 변혁 운동, 통일 문제, 토지 문제 동 다양한 시사 문제에 관한 논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지의 재정비를 위해 91년 다음 해 인 92년도에는 교지 발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93년에는 특이하게도 3 권의 교지가 발행된다. 92 년도를 회고하며 그때의 이야기를 담은 93년 25호와 93년 중반기의 내용을 담은 26호(여름호), 또 93년도 하반기의 내용을 담은 27호(겨울호)로 그 구성을 이룬다. 25 호에는 '이론과 실천'이 가장 먼저 목차를 이루고 있고 그 내용으로는 '92 년 대통령 선거와 진보 운동의 미래 '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때의'이구동성 '코너는 기자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다룬 개인 기사가 주를 이룬다. 또 '말 소리 함성'에서는 과학생회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등록금 문제도 대두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있다. 93년 여름호인 26호는 김영삼 정권으로 정권이 바뀌며 무엇이 달라 졌는지 사진과 그림으로 보여주는'무엇이 달라 졌는가 '코너로 시작된다.이시기 교지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성(性)'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실었다는 것인데 특히 만화 '여성 이야기 주머니'는 오늘날 교지에 실어도 무방할만큼 현실을 꼬집고 있었다. 또 이구동성에는 '신세대 연애관'과 '성문화'에 관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93년 겨울호 인 27호에서는 '편집실 기획'이라는 코너가 새로 생긴 점이 특징적이었다. 4.28호 -30호 (1994년 -1996년) 94년부터 96년의 교지에는 이전과는 다른 이름 인 X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혼란과 과도기적인 모습들이 담겨있다. 이전 세대인 386세대엔 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정보다는 민주화를 향한 단결의 모습들이 더 강조되어왔다면 X세대엔 그 초점이 개인에게로 돌아 간다. 28호 교지에는 이와 같은 변화를 비판적으로보고 성찰하는 내용의 만화가 실려 있기도하다. 28, 29 호 권두시가 각각 김남주의 <자유>, 전 무용의 <강의실에서>와 같이 스러져가는 개인의 의지를 비판하는 시라는 점으로 보아 그 시대상의 변화에 비판하며 성찰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29 호 교지에서의 이론과 실천 코너의 '세계화', '세계화의 현장', 그리고 자하 논단 코너의'쓰레기 종량제', '환경 운동 단체의 정치성 '등을 통해 세계화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9호 교지엔 이전에 한국 문화 중심이었던 문화에서 벗어나 '일본문화', '애니메이션', '문화 탐방'등의 코너를 넣어 세계화로의 움직임을 증명했다. 96년도는 여러모로 자하에게 뜻 깊은 한 해였던 것 같다. 우선 '상명여대'에서 남녀 공학 '상명대'로 변화 한 것의 영향력도 있었고 교지도 30 주년을 맞아 그 역사를 싣고 이전 두 해의 교지와는 다르게 빳빳한 컬러 사진을 대량 삽입한 모습을 보인다. (그 영향 때문인지 타 교지에 비해 그 두께가 현저히 줄었다.) 내용적인 측면도 '교육 개혁 !!!'이라든가 '서울대 동성애자 모임 탐방',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혁이다 ~ 신촌 공간의 정체성 모색'등과 같이 파격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96년도에는 또 이전에 전적으로 싣다시피했던 만화 코너가 사라지기도한다. 5.31호-32호 (1997년 -1998년) 97 ,98년 교지엔 정보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실제로 교지뿐 만 아니라 국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우리 학교 96 학번인 연상호 감독의 말에 따르면 군대 갔다 온 2 년 사이에 갑자기 컴퓨터가 상용화 돼서 놀랐다는 증언이 있다.) 인터넷의 사용이 일상화되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소수만 가지고 있던 컴퓨터 역시 상용화되는 등의 변화를 겪는다. 31 호 교지엔 아예 '정보 시대-정보 속으로 끼어 들기'라는 코너가 만들어져 그 변화를 입증한다. 이전에 '이론과 실천'의 주된 내용들은'학술 기획'과 '시대 읽기 '로 나뉘어져 전자에는 논문들이 후자에는 당대 정치를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온다. 이때 눈에 띄는 점은 'TV 토론'이 등장한 것인데 이를 통해 점점 TV와 컴퓨터의 시대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혼돈의 시기여서일까(?) 31호 교지의 구성도 혼란하기 그지 없다. 무려 큰 목차 만 13 개로 나뉘고 각 목차마다 두 개의 이름이있다. 예를 들면 '문화 기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반대편에 '<코드명! 상상력을 잠재워라>의 또 다른 이름이 붙는 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목차 아래에는 하위 항목들이 대략 2-3 개 씩 존재해 혼란함을 더한다. 또 '색인'을 넣어 보는 등의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 권두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펴내는 글로 시작되는 것도 혁명적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꽹가리 치는 잘 생긴 학생의 표지가 인상 깊은 32호 교지는 오늘날의 자하 교지와 가장 비슷한 목차 구성을 보인다. 전체 기획 등의 기획 구성이나 여러 분야의 사회 기사를 작성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구성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집글로는 '이 땅의 예비 실업자에게 고함', '여성 실업의 주류에 역행한다.' 등 실업, 특히 여성 실업에 중점을 두고 주목하는 모습을 보인다. 32호 교지에는 또 사라졌던 권두시도 다시 등장하게된다. 6.33호 -34호 (1999년 -2000년) 그러나 다시 99년과 00년도엔 목차가 주제별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별로 분류하는 목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구성을 이룬다. 예를들면 교육에 관한 이슈들을 다루던 '말 소리 함성'과 같은 코너가 '거꾸로가는 교육! 방향키를 잡아라!'(99년 교지) 라든지 '상명이라는 이름으로'(00년도 교지)와 같이 주제에 맞는 이름으로 바뀌게된다. 99년도는 아직 가상 공간, 사이버 등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다원적 국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NGO 단체에 관한 글들을 다수 싣는 등 다양성 존중의 시작을 보인다. 00년도에는 다양해진 목차만큼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기사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 시대의 이카루스 비 주 류'와 같이 아예 비주류에 관한 특집 주제가 있고 참여 민주주의라든지 비정규직, 에코 페미니즘 등 그 동안 많이 주목받지 못한 주제들을 싣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앞선 90년대 중반의 '나 ' 즉 개인의 권리에서 나아가 다양한 '너 '들을 존중할 수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7.1990년대 자하를 만난 소감 확실히 교내와 교외의 소식을 두루 전하는 교지의 특성 덕분인지, 90년대로 돌아가 우리학교와 우리나라의 10년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90년대는 1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격동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였다. 90년대 초기엔 단결하여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려는 열망을 보였다면 중후반엔 개인에게 집중하는 모습들을 더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에는 개인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타인 개개인, 즉 다양성을 존중하려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단결을 중시하던 '우리'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나'에게 집중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화했고 후에 다양한 '너'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교지가 없었다면 영원히 잊힐 수도 있었던 그 수많은 열기와 함성들이 우리 선배들이 꾹꾹 눌러쓴 소중한 기록 덕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벅찬 감동을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 '웹진'이란 형태로 그 겉모습이 바뀌긴 하겠지만 후에 이십년, 삼십년 뒤 후배들이 우리들의 글로 오늘날의 모습을 기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 좋은 부담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 사이트는 자바스크립트를 지원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