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호 “종이 빨대 사용은 ESG 경영에 해당하는가?” - 기업의 ESG 경영에서 발견한 모순 -
수습기자 김나현 202210152@sangmyung.kr 경영의 새로운 걸음, ESG와 그 실체 기업의 모습이 변화하고 있다. 요즘의 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려는 만큼, 사회적 책임도 요구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사회공헌 활동, 기업 시민, 이해관계자경영, 지속가능경영 등으로 혼용 및 확장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ESG 이슈로 활발한 논의를 지속 중이다. 전문가들은 대표적인 최신 경영 트렌드로 ESG 경영을 제시하고 있다. ESG란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 사회, 지배구조까지 고려하여 기업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업성과지표를 뜻한다. 기업의 사회적 활동을 계량화해 지속가능투자의 관점으로 개발한 지표라는 점에서, 기존의 전통적 성과지표와 비교했을 때 오늘날 세계정세에 부합하는 신선한 지표로 평가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을 비롯해, 이제는 국내의 기업들도 ESG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ESG 경영은 가장 ‘HOT’ 한 트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ESG 경영은 정말 그 의미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합리적 의심을 시작으로, ESG를 구성하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 중 특히 사람들이 가장 쉽고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요소인 환경으로 한정하여 친환경을 추구하는 기업 경영의 모순을 발견해 지적하고, 기업의 행동 방향성 변화를 촉구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기업의 ESG 경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금, 녹색경영이라는 번지르르한 말 아래 숨겨진 것은 없는지 생각해 봐야 했다. ESG인 척하는 ‘그린워싱’, ‘그린버블’ 문제 파악을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ESG라는 새로운 경영 철학의 유행이 그 의미에 맞게 좋은 점만 야기하면 좋겠지만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기업들이 대충 모방하여, 결과적으로 소비자를 속이게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나타내는 키워드, ‘그린워싱’은 기업들이 실질적인 친환경 경영과는 거리가 있지만 녹색경영을 표방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환경주의’를 가리킨다. 예컨대 생산 과정에서의 환경오염 문제는 축소하고 재활용 등 일부 과정만을 부각하여 마치 친환경인 것처럼 포장하는 사례가 이에 해당하며, 이 과정에서 기업의 가치가 과도하게 부풀려진다는 의미의 ‘그린버블’은 그린워싱과 유사하게 사용된다. 카페에서 종이 빨대 사용은 ESG 경영에 해당할까? – ESG 경영 모순 사례에 대하여 ESG 경영을 모방한 위장환경주의, 기업의 그린워싱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기업의 녹색 경영 모순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직접 경험해 보고 의문이 들었던 두 가지 사례의 모순을 선정해 파헤쳐 보고자 한다. 하나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이 쉽게 경험해 봤을 <스타벅스의 종이 빨대 사용 지침> 사례를, 다른 하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아이돌 음반 시장에서의 녹색 경영 시도> 사례를 골랐다. 생소하게 느껴질 <아이돌 음반 시장에서의 녹색 경영 시도> 사례를 골랐다. 우선<스타벅스의 종이 빨대 사용 지침>에 대한 이야기이다. 카페에서 사용되는 플라스틱 빨대의 사용량이 많아지자, 스타벅스는 환경 보호를 명목으로 전국 1,200여 개 매장에 종이 빨대 전면 도입 지침을 내렸다. 스타벅스는 플라스틱보다 분해가 쉽다는 종이 빨대의 친환경적 특징을 내세웠지만, 종이 빨대 사용에 절대적인 장점만 있진 않다. 종이 빨대는 종이로 만들어졌지만 언제나 재활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며,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을 비교했을 때 플라스틱 빨대를 만드는 것보다 종이 빨대를 만들 때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미국 환경보호국(EPA)의 연구 결과 때문이다. <참조1> 그리고 이보다 큰 문제는, 종이 빨대 사용과 동시에 시즌별로 쏟아지는 여러 종류의 MD 판매는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타벅스의 시즌별 MD는 출시할 때마다 엄청난 관심을 끌어왔고 그 종류와 가짓수도 다양하다. 그렇지만 시즌별 MD 생산과 판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롭고 많은 양의 쓰레기로부터 또 다른 환경 오염을 야기함을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환경을 생각한다는 기업의 녹색 경영 추구를 위해 플라스틱 빨대에서 종이 빨대로 사용 지침을 변경했지만 이와 동시에 꾸준하게 많고 다양한 MD 판매를 이어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환경적 모순, 그린워싱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이돌 음반 시장은 어떨까? 세대를 거쳐 K-pop 역사가 녹아 있는 엔터테인먼트계의 대기업, SM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엔터 기업들 역시 ESG 녹색 경영을 추구하는 추세이다. 여러 시도 중에서도 아이돌 음반 제작 과정에 친환경적 변화를 도입하여 적은 투입 대비, 많은 사람의 이목을 빠르게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기존의 실물 앨범 소재인 PVC, 코팅 종이가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문제에 대해 친환경 소재로의 앨범 제작으로 변화를 주거나, 앨범 구성품의 대부분을 미디어 콘텐츠로 제공해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는 플랫폼 앨범을 발매하는 등의 녹색 경영 전략을 펼쳐오고 있다.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엔터테인먼트의 경영이 과거와 달리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린워싱에 결백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참조 2> 친환경 소재로 제작한 앨범 <참조 3> 구성품을 간소화한 플랫폼 앨범 K-pop 시장은 소위 ‘팬덤(fandom) 장사’라고 불릴 만큼 팬덤의 영향력이 강해서, 기업의 이윤 대부분이 팬덤 규모에 의해 정해진다. 기업은 소비자인 팬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장사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가수의 음반 판매 지수를 높이려는 경영 전략을 내세운다. 해당 전략의 주요 키워드는 ‘랜덤’이며, 앨범의 구성품이 모두 랜덤이라는 점을 극적으로 활용해 소비를 유도한다. 친환경 소재로 앨범을 제작하거나, 플랫폼 앨범 발매로 쓰레기를 줄이려는 노력은 소비자에게 기업의 건강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불필요한 요소로 인해 결과적으로 앨범 생산량이 전보다 늘어났으며 생산 과정에서의 환경 오염 문제는 뒤로 숨긴다는 점에서 ESG 경영으로의 노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를 직접 느끼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기사 작성에서 조금 벗어나 누군가의 팬으로서 겪은 경험을 얘기하자면, 엔터 기업과 팬덤의 관계에서 팬들은 항상 소비자인 동시에 ‘을’이 되기 때문에 기업의 과도한 소비 유도 전략에도 딱히 저항하지 못하고 구매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엔터 기업의 판매 전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내 가수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 때문에 속아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엔터 시장은 주 소비자층이 고립됐다는 면에서, 비판적인 경영 전략에 대한 개선 의지가 없어 보이는 게 당연한가 싶기도 했지만, 환경을 죽이는 동시에 환경을 살리겠다는 기업의 이면성을 마주할 때마다 더 이상의 속임수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SG 경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업이 정말 ESG 경영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든, 단순히 건강한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든, 현재 ESG 경영에 적신호가 들어왔음은 이제 확실하다. 이름만 ESG인, 위장환경주의 기업이 많아지고 있고 그 경계가 흐릿해졌기 때문에 앞으로는 기업의 행동 방향성 변화에 대한 촉구와 국가 차원에서의 공식적인 제재 강화,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기업의 경영 모순 사례가 생기는 이유에는 소비자의 소비 책임보다 기업이 이미지 형성 측면에서 위장환경주의를 지속하고 있다는 문제가 크게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이가 기업의 경영과 모순 사례에 관심을 기울이면 더 빨리 변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이 충분한 생각과 고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기업의 ESG 경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모순 사례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지금까지의 소비도 한 번 되돌아본다면 좋겠다. [ 참고 문헌 ] 1. 정인희⋅반혜정(2021), 「투자자 심리에 의한 ESG가 기업위험에 미치는 영향 」, 『회계정보 연구』 39(3), 100쪽.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2.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ESG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03698&cid=40942&categoryId=31821 3. 네이버 지식백과(시사상식사전) – 그린워싱, 그린버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30884&cid=43667&categoryId=43667 4. 신승민, “종이 빨대가 친환경?”…‘플라스틱 빨대 금지’ 논란 왜?, KBS NEWS, 2022.10.11,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74681 5. 유민정, [초점] "종이 빨대는 친환경이 아니다", 케미컬뉴스, 2022.05.16, http://www.chemic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87 6. 스타벅스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tarbucks.co.kr/whats_new/newsView.do?cate=&seq=4930 7. 곽은영, [플라스틱 한바퀴] PVC는 왜 나쁜 플라스틱으로 불릴까, 그린포스트코리아, 2021. 8. 12, http://www.greenpos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943 8. 김지원, K팝과 환경 보호, 업계에도 변화 움직임, 스포츠 Q, 2022. 5. 26, http://www.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0537 9. SMTOWN&STORE 공식 홈페이지 https://smtownandstore.com/ 10. 메인사진_스타벅스코리아
제 4 호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202210316@sangmyung.kr 정기자 정지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우리나라는 ‘성과사회’이다. 산업혁명 이후 확연히 달라진 우리 사회는 시대가 흐를수록 ‘빨리빨리’를 외치며 남들보다 더 많은, 더 나은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성과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하고, 해내려 하고, 증명하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과를 향한 부담감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과사회 속에서 때때로 알 수 없는 피로감과 우울함에 빠지곤 한다. 나도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괜히 무기력함에 사로잡힌다. 무언가에 대한 목적이 있을 때는 그것을 해내야만 하는 강박감에,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는 목표가 없어졌다는 허전함에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예시이지만, 마치 이번 기말고사가 끝나기만 하면 기막힌 연말을 보내고 새롭게 신년 계획을 세우며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낼 것만 같았던 내가 시험 후 원인 모를 권태감을 느끼며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시간을 허비한 것처럼 말이다. 앞서 말했듯 성과사회 속 개인은 그 누구에게도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의 과정, 그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자기 스스로 부여한다. 피로와 우울,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시대의 아주 위험한 질병이다. 이러한 성과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챙기기도 모자랄지언정,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등의 이야기와 함께 사회를 챙기려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껏 내가 쓴 글만 읽어보더라도 일기를 쓰며 다짐하거나 혼자 생각에 잠길 때 마지막은 항상 ‘선한 영향력을 미쳐 사회를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겠어.’라는 번지르르한 말로 글을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말들은 언뜻 보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포부와 같이 그저 보여주기식의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제가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열정을 쏟아 회사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겠습니다!’처럼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도 우리에게 사회에 기여 하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그런 의무를 부여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사회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갖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피로사회’에 따르면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이라고 한다. 우리는 대개 ‘긍정성(肯定性)’은 말 그대로 긍정적인 것, ‘부정성(否定性)’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심지어 나의 좌우명은 ‘긍정적으로 살자.’이며 긍정의 힘을 그 누구보다 믿어온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긍정성이 우울증과 연결이 되니 혼란스러웠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그리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긍정이 오히려 우리를 더 우울하게 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소망과 바람을 성과사회 속 무한한 긍정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금방 지쳐버리게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자신에게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게 하는 것일까. 대체 누가 우리에게 슈퍼맨도 해내기 벅찰 것이 분명한 이런 막중한 임무를 부여한 것일까. 무언가 글을 쓰거나 발표하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이런 포부를 밝히는 나의 생활을 돌아봤다. 그저 나를 꾸미고 보여주기 위한 말인지, 선한 영향만을 미치고 싶은 사회에 대한 애정인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후자였다. 그렇다고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 대한 애정은 아니다. 그저 나의 작은 힘으로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만 있다면 행복할 듯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그리고 더 괜찮은 사회에서 하루라도 빨리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변화된 사회를 향한 기대감의 애정을 가지고 그런 말들이 쉽게 나왔던 것으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긍정으로 자신 있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가 실패하여 나중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들게 될 수도 있다. 이론과 실재가 늘 같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먼 훗날 자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없을지 당장은 알 수 없더라도 그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순간부터는 사회에 ‘소속’돼 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하게 만든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 또한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라는 책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 주인공 바틀비는 직장에서 일 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은 날, “I would prefer not to.”라며 자신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의 말을 거절한다. 심지어 자신의 주 업무인 필사 일까지 거부하고 결국 해고된다. 바틀비의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바틀비의 대사 “I would prefer not to.”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등으로 번역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같은 문장임에도 어떤 문장은 바틀비의 ‘선택’ 자체에 집중하고, 어떤 문장은 ‘Want’에 집중한다.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직원들이 바틀비의 말투를 따라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처음에는 바틀비를 어딘가 낯설게 보았지만 점점 그에게 빠져든 것이다. 그들은 잠시 치열한 성과사회 속에서 개인 스스로 자신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바틀비가 되어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자 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한 사람의 행동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바틀비는 모두가 맞는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사회에 전파한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어려워하는 사회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용기 있어 보인다. 만약 정말 ‘피로사회’의 정의대로 긍정적 힘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부정적 힘이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면 때로는 바틀비와 같이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거절하는 것을 못 한다. 사실 나에게는 어떤 것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바틀비처럼 명확하게 ‘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제안하기까지의 용기가 혹시나 내가 거절 함으로써 상처가 되거나 무안한 감정을 들게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일까. 그래서인지 이런 성격 탓에 인간관계에 있어 이유 모를 오해들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는 바틀비가 더 대단해 보였고 많이 배웠다. 성과사회 속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여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말 한마디와 행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품고 있다. 작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 큰 목소리가 되고 이는 더 나아가 사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바틀비가 되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문제가 있다면 감추지 말고 꺼내어 보자.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버리고, 그저 하고 싶은 게 많은 초등학생이 되어 무작정 내뱉어 보자.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그 무엇이든 전하고자 하는 바가 진심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꾸준히 내뱉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와 책임감이 생겨 우리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바틀비처럼 용기를 가지고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고 싶은 목적과 마음만 있다면 그 마음들이 모여 사회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잉 긍정은 스스로를 착취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580673.html> 메인사진 _ "I would prefer not to." https://readingjournal4hurst.blogspot.com/2015/01/herman-melvilles-bartleby-scrivener.html
제 4 호 자그마난 볼펜 모나미 153
자그마난 볼펜 모나미 153 정기자 201710846@sangmyung.kr임 지 혁 오늘도 어딘가의 책상에서 굴러다닐 흰 색에 검정색, 어쩌면 육각 연필과도 비슷하게 생긴 볼펜 한 자루, 모나미 153을 집어 들고서는 주머니에 넣었다. 필자는 그 후에야 문을 열고 나서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는 한다. 문구점에서 300원 정도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으면서 요즘은 더러 특이한 외관을 가진 특별판들도 눈에 들어온다. 153은 우리들의 일상 다반사의 잡담에도 종종 등장한다. 어떤 고등학교 선생님은 학력고사를 준비하면서 하루에 모나미 153 한 자루를 다 썼다고 이야기하시고, 어떤 기자는 휴대하면서 잉크가 새지 않아서 모나미 153을 애용했다고 이야기한다. 요즘에는 유니의 제트스트림이나 파이롯트의 프릭션 등 수입산 볼펜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 모두 모나미 153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모나미 153은 단순히 저렴하고 자그마한 볼펜 한 자루를 넘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1 : 지상자에 담긴 모나미 153 볼펜들. 2004년 경] 취향에 따라서 주머니 속, 혹은 필통 속에서 꺼내어 한 손으로 노크하고, 그렇게 곧바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다 썼다면 단순히 튀어나온 상어 지느러미 모양의 부품을 눌러주어서 심을 다시 몸체 속으로 넣으면 된다. 글을 쓰면서는 흔히 말하는 ‘볼펜 똥’이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요즘 것들은 많이 좋아져서 글을 쓰는 데 불편하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이 과정, 오늘은 그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볼을 굴려 가며 잉크를 묻히는 필기구인 볼펜의 특허는 1888년에 처음 등록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 때의 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반 세기가 지나서 1938년에 이르면 더 실용적인 볼펜의 특허가 등록되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에는 마침내 미국 맨허튼의 어느 백화점에서 볼펜이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4년 뒤인 1949년에 이르면 일본에서도 볼펜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후로 일본의 수많은 문구 업체들이 볼펜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회사들 가운데 AUTO(현 OHTO, 이하 오토)는 1962년 326이라는 볼펜을 개발한다. 당시의 저렴한 볼펜들은 요즘의 네임펜처럼 뚜껑이 있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326은 뚜껑을 열어야 할 필요 없이, 단순히 끝을 눌러주는(노크) 것으로도 글을 적기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노크식 볼펜은 있었지만 오토는 경제적이면서도 간결한 구조로 구현하였고, 이를 통하여 일본에 노크식 볼펜을 보급하게 된다. 요즘에도 많은 일본의 볼펜들이 노크식 구조를 가진다. 모나미 153은 지금도 한국에서 제조하고 있지만 온전히 한국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토 326이 나오는 그 즈음에 작년 초에 타계하신 모나미의 설립자, 고 송삼석 모나미 전 회장이 일본의 오토 사와 접촉한다. 당시 광신화학공업사라는 이름이던 모나미, 그리고 일본의 문구 기업 오토의 만남은 유별나게도 5.16 쿠데타에서 시작한다. 1962년 군부는 반란 1주년을 자축하며 국제 산업 박람회를 개최하는데, 여기서 송삼석 전 회장과 일본 우치다 양행이 함께 참석했다. 이 때 송 전 회장은 우치다의 소키쿠 과장이 사용하던 볼펜을 목격하고서는 한국에 출장 온 소키쿠 과장을 극진히 대접한다. 결국 1962년 7월에는 우치다에 볼펜을 납품하던 오토볼펜주식회사를 소개받으며 모나미는 볼펜 제조의 첫 발을 떼었다. 송 전 회장은 오토로부터 볼펜 볼 등을 수입하는 대신 볼펜 잉크 제조 기술 등을 도입하며 귀국하였고, 연구와 개발 끝에 모나미 153이라는 이름의 볼펜을 출시한다. 이름이 왜 모나미 153이었을까? 당시에는 교육 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불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더불어 사내에 한불사전을 끼고 사는 불어를 좋아하는 직원이 있었다고도 한다. 때문에 불어의 기본적인 문장이었던 Mon Ami(나의 친구)라는 단어가 사내 이름 공모전에 제출되었을 때 이에 호응하는 직원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53이라는 숫자에는 요한복음의 “그물에 가득 찬 큰 물고기가 백 쉰 세(153) 마리라.”라는 구절에서 빌려왔다고도 하고, 1963년 5월 1일에 볼펜 잉크 개발이 완료되어 그런 이름이라는 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3번째로 만든 15원짜리 볼펜이라는 의미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 모나미의 송하경 회장이 153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잉크 노하우보다도 비밀’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세 가지 이상의 이유가 붙을 정도이니 오히려 이 볼펜에 153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과정들을 거치어서 마침내 MonAmi 153이라는 이름을 가진 볼펜이 탄생한다. 이는 오토 326과 유사한 디자인을 가진 볼펜이었다. [그림 2 : 모나미 153 볼펜들의 모습] 한국과 일본의 우연한 만남, 그 결과 오토 326과 모나미 153이라는 쌍둥이 볼펜이 세상에 출시되었지만 그 말로는 사뭇 달랐다. 오토 326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잊혔고, 반면 모나미 153은 올해면 벌써 60년 동안 한국 사람들의 곁에 함께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할아버지 세대 정도만이 그것도 아주 간혹 오토 326이라는 볼펜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우리 세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왜 이런 차이점이 생겼을 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기 위해서 잠시 연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은 어쩌면 일본보다도 연필에 친숙한 나라다. 요즘에는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1960년 경까지도 연필은 한국인에게 굉장히 귀중한 서구 필기구였다. 당시에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필기구라고는 만년필, 볼펜, 샤프펜슬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미국이나 일본산의 고가 수입품이기 때문에 함부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반면 연필은 국내에서 그 원료를 구할 수 있고, 때마침 국내에 제조 시설도 존재하였다. 연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서양식 휴대용 필기구였던 것이다. 모나미가 세상에 나오던 즈음, 그런 옛날의 한국 시장에서는 연필 모양의 디자인이 더더욱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육각형 몸체에 검정색 끝 단을 가지는 연필과 비슷한 볼펜, 오토 326은 머지않아 일본에서 단종되지만 한국에서는 그 외형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음은 이렇듯 그 디자인이 한국에 더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나미 153의 디자인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꼭 들었고, 그래서 국내의 다양한 업체들이 비슷한 모습을 가진 다양한 볼펜들을 출시했다. 오늘날에도 문구점에서 153과 유사한 모습을 가진 다양한 볼펜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이렇게 비슷한 모습의 볼펜들이 우후죽순으로 시장에 나왔다면 153은 그 매혹적인 외관만으로 시장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모나미 153은 그 전통적인 외관의 모습을 유지하는 대신 그 내부는 끝없이 변화했고, 그렇게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모나미는 우치다 양행은 물론, 세일러만년필이나 주우화학 등 일본의 문구 회사들과 끊임없이 접촉하였으며 나중에는 유럽의 문구 회사와 합작 회사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전 세계의 기술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153은 유연하게도 사람들이 더 쓰기 편하도록 바뀌었고, 더 내구가 높아지도록 바뀌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 3 : 2004년의 모나미 153과 2018년의 모나미 153의 비교. 위가 2004년, 아래가 2018년이다.] 만약 새로 볼펜을 사려고 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모나미 153을 선택하겠지만 우선 그것은 제외하기로 하자. 한편 요즘 문구점에는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다색 볼펜들이 많지만 일단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검정, 파랑, 빨간색 볼펜만 생각하기로 하자. 이 두 가지 조건 속에서 볼펜을 고르면 많은 사람들이 매끄럽게 글이 적히는 볼펜을 선호한다. 조금 뻑뻑하면서도 탄탄히 적히는 것보다는 부드러우면서 걸림이 없고, 그러면서도 진하게 적히는 볼펜이 인기가 많다. 이런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유명한 볼펜이 바로 지난 2006년 일본의 문구 기업 유니가 선보인 제트스트림(Jetstream)이다. 제트스트림은 점도가 낮은 잉크를 기반으로 매우 매끄러우면서 부드러운 필기감을 구현한 볼펜이다. 컴퓨터처럼 힘을 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필기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제트스트림에 열광했으며 어느새 ‘저점도 잉크’는 볼펜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그렇다면 153은 어떨까? 문구점에 새롭게 입고된 모나미 153의 포장을 풀고, 다시 종이에 적어본다면 제트스트림과 비슷하게 매우 묽고, 부드럽게 글이 적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제트스트림을 애용하는 독자라면 요즘의 모나미 153도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모나미 153이 처음부터 이런 잉크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새 상태의 1994년산 모나미 볼펜을 사용해보면 그 시기의 다른 볼펜들과 비슷하게 다소 뻑뻑하면서 탄탄하게 글이 적힌다. 글씨를 적는 데 힘은 다소 들지만 조금 더 꼼꼼하면서도 정갈하게 적히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그것보다도 이전의 것은 어땠을까? 필자는 아직 정상적으로 잉크가 나오는 먼 옛날의 153을 찾지 못했으나 옛날에 그것을 사용했던 분들께 여쭈니 또 다른 필기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연필과 비슷한 외관은 거의 바뀌지 않았지만 그 속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변화하는 취향에 맞게 바뀌었다. 여기에 2007년경에 볼펜의 구조가 다소 바뀌는 등, 그 내구 또한 개선되면서 지금의 모나미 153은 변하지 않는 외관, 그리고 그것에 더하여 유연한 내부까지 겸비하면서 완벽한 볼펜에 이르렀다. 일본의 어느 볼펜에서 얻은 모티브는 그렇게 오늘날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마음에 들면서도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보기에도 쓰기에도 좋도록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13년 모나미 153의 출시 50주년을 기념하여서 만든 한정판 제품은 모나미가 맺은 하나의 과실일 것이다. 이 볼펜은 2만 원의 가격을 가지고선 1만 자루를 한정으로 생산했는데 출시되던 때에 웹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빠르게 완판했다. 그렇게 모나미 153은 단순히 자그마한 싸구려 볼펜이 아닌, 그 이름처럼 ‘나의 친구’이자 일종의 문화적 상징임을 증명했다. [사진 4 : 2021년에 모나미 153의 고급형으로 선보인 독도 특별판] 모나미 153이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는 아마도 이를 기념하는 새로운 볼펜이 나올 것이다. 우리들의 친구, 어느 조그마한 볼펜의 환갑 잔치, 그것은 우리들의 미래에 어떤 형태로서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줄까.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파란색 153 볼펜을 바라보며 잠시 상상에 잠겨본다. 마침 사용하던 153 한 자루의 잉크가 얼마 남지 않은 참이다. [참고자료] 송삼석. (2003). “내가 걸어온 외길 50년”. 한국일보사. 메인사진 _ 모나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CpUcAe3PUJG/
제 4 호 예비입대자가 말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예비입대자가 말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202110483@sangmyung.kr 정기자 양현준 20살, 누구에게나 20살은 설렘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저 쓸 곳 없는 플라스틱 카드였던 주민등록증에 의미가 생기고, 이제는 각자 꿈꿔온 목표를 향하여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성인이 된 우리는 자유와 희망을 얻음과 동시에 의무와 책임 역시 떠안게 된다. 20살이 되자마자 체감할 수 있는 의무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국방의 의무’이다. 이때부터 병역판정검사를 시작으로 병무청(징집·소집 그 밖에 병무 행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누구나 그랬듯 한 번쯤은 막연하게 ‘내가 군대에 갈 시기면 통일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어쩌면 정해진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서 투영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 다가온다. 군입대 시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가도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왜 군대에 가야...아니 왜 끌려가야 되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군대에 가야 할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현재 우리나라는 징병제로 군대를 운영하고 있어서이다. 여기서 징병제란 일정 나이에 도달한 국민이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의무적으로 병역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병제에 속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즉,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와 유사한 완전 징병제인 국가는 이스라엘과 스위스, 콜롬비아가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직업 군인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해서 군대를 유지하는 제도인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시 다른 국가처럼 모병제로 전환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정치적 논의는 꾸준히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는 아직 휴전상태이다. 잠시 전쟁을 쉬어가고 있는 것이기에 북한의 행보에 귀를 기울이고 긴장해야 한다. 국방 기술 진흥연구소가 2022년 12월 9일 발간한 ‘2022 세계 방산시장 연감’을 보면, 우리나라의 2021년 국방비 지출은 500억 달러로 전년도에 이어 세계 국방비 지출 10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통해,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방비로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국방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병력을 줄이는 선택을 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과거와 달리 첨단과학 기술이 군에 도입되고 있기에 적정한 병역자원이 확보될 수 있다면, 병력을 줄이고 모병제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징병제임에도 병력확보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것이 한국의 실상이다. 현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 직면해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출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26만 600명으로 1년 전보다 4.3%, 1만 명 넘게 줄었다. 이는 역대 최저치이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은 0.81명으로 전년 대비 0.03명, 즉 –3.4% 감소했다. 이 역시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저치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명에 못 미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었다. 한국보다 인구 규모, 군사적 위협, 군 복무 환경, 군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 등 여러 면에서 모병 여건이 좋은 나라에서도 모병은 갈수록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1963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모병제를 도입한 영국은 2019년부터 외국인에게까지 지원 대상을 넓히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독일은 통일 이후 20년이 지난 2011년에야 모병제를 시행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병력 부족을 겪고 있으며, 현재 징병제로의 환원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마냥 긍정적이지 않다. 상황을 미루어봤을 때, 군입대는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마련이다. 남성 모두가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다. 병역판정검사를 통해 4급 이내로 판정받아야만 복무대상자로 선정되어 군복무를 하게 된다. 그러나 통계청을 통한 한국의 병역판정검사 현황을 살펴보면, 2021년 복무대상자로 판정된 사람들은 85%에 이른다. 사실상 모두는 아니지만, 높은 수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의 85%나 되는 사람들 모두가 현역, 즉 군대에 직접적으로 입대하는 것은 아니다. 4급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보충역인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사회복무요원이란 병역법 제26조 제1항 제1호 및 제2호에 따라 국가기관·지방자치단체·공공단체 및 사회복지시설에서 복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사회복지시설에서 노인·장애인 신체활동 지원, 유치원·초·중·고 학교 또는 교육청에 소속된 장애 학생 활동 지원, 생활안전 및 교통업무 지원, 사회서비스업무 및 행정기관 경비지원 분야 외의 복무 분야에서 사무보조ㆍ민원 안내ㆍ상담 등의 업무가 있다. 사회복무요원은 보통 평일 09시~18시까지 근무하며, 자택에서 출퇴근하는 구조이다. 여기서 누구나 의구심이 드는 게 자연스럽다. 사회복무요원이 하는 일이 ‘병역’, 군복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에서 나열된 업무들은 군사적 성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공무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회복무요원의 월급은 60만~80만 원대로 군 사병보다 10만 원 이상 많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모두 제공되는 군인들과 달리 사회복무요원은 집과 일터를 오가며 주거비, 생활비를 모두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2년 최저생계비의 기준이 되는 1인 가구의 중위소득 60%가 116만 6,887원이다. 2인 가구와 3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각각 195만 6,051원, 251만 6,821원이다. 누가 보아도 사회복무요원의 월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서울과 같이 대도시에서 산다면, 기본적으로 지출해야 할 비용이 더 커진다. 지난달 서울시에서 계약된 연립다세대·단독다가구(전용면적 60㎡ 이하)의 평균 월세는 44만 5,000원(보증금 4003만 원)이다. 자취하는 사회복무요원이라면, 월급의 절반 정도를 집세로 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중식비로 지급되는 7,000원도 현재 물가를 고려하면, 합당한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사회복무요원 관리 규정에 따르면, 겸직을 허가할 수 있는 사유는 본인 또는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서나 수급권자·차상위계층·한부모가족지원법 지원 대상자이거나 그 밖에 복무기관장이 부득이하게 인정하는 경우 등으로 제한되어있기에 겸직을 통해 금전적인 여유를 추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적 성격이 전혀 없는 일들을 징병제라는 틀 안에서 그저 최저임금보다 턱없이 모자란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충원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상은 그럴싸한 제도 속에서 자신의 재산 또는 부모님, 배우자의 재산을 갉아먹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는 과연 누굴 위한 제도일까. 병역판정검사 4급이 의미하는 바는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굳이 ‘병역의 의무’를 다른 형태로 수행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저 무작정 개인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비상식적인 행위가 아닐까? 연기자 A(현역 복무자) : “야, 지금 다 물어봐. 형님이 싹 다 알려줄게. 사실 너희도 알겠지만, 나 몸무게 때문에 4급 받았었잖아. 현역으로 갔다 와야 내 성격이 허락할 거 같아서 슈퍼힘찬이 제도를 신청했거든, 그래서 살 빼고 현역으로 입대한 거 아니겠냐.” 연기자 B(친구) : “네 성격 같으면, 군대라도 다녀와야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남자라고 이야기하고 다니지.” 연기자 A(현역 복무자) : “어차피 우리 다 군대 가야 하잖아. 그런 거라면 제대로 가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인 거지.” 병무청이 2021년 11월경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렸던 ‘친구에게 듣는 군 생활 이야기’라는 제목의 5분짜리 영상 중 일부 대사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슈퍼힘찬이’ 제도는 시력·체력에서 4·5급 판정을 받았지만, 현역 입대를 희망하는 경우, 병원이나 피트니스 클럽, 보건소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문제는 다음 대화에서 발생한다. “네 성격 같으면, 군대라도 다녀와야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남자라고 이야기하고 다니지.”라는 부분이 많은 사람에게 뭇매를 맞았다. 일주일 사이 해당 영상에는 5천8백여 개의 댓글이 달리면서 논란이 일컫고, 병무청은 “본래 취지와 달리 논란이 된 것에 유감이다.”라며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하였다. 군인들의 마음과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대변해주어야 할 병무청이 사회복무요원과 현역 입대자를 평등한 시선으로 보지 않고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현역 입대자가 아닌 사회복무요원은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남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군부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병역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병무청이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사회복무요원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그럴싸하게 말로만 포장했을 뿐이지 실상은 모순만 가득한 제도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BTS, 아시아 최초 영국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오른 손흥민, 영화 ‘기생충’을 통해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알린 봉준호 등 분야별로 이름을 알린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흔히 애국심을 느끼곤 한다. 20대, 갓 성인이 되어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시기에 남자들은 18개월 혹은 21개월가량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된다. 대부분이 나의 조국, 나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명감과 애국심이 아닌 군대에 억지로 끌려간다는 억울함과 불만을 품고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 필자는 군대라는 곳이 애국심을 심어주는 것까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에 있던 애국심마저 군대라는 제도에 대한 의구심으로 변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군대를 다녀오면, 있던 애국심마저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2014년 선임병들의 구타ㆍ가혹 행위 때문에 사망한 윤 일병 사건, 2023년 강원도 태백의 육군 부대에서 혹한기 훈련 중에 사망한 병사 사건, 군대 부실 급식 사건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여럿 발생하였다. “군대는 작은 일도 크게, 큰일도 작게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이 존재하듯, 가장 폐쇄적인 집단인 군대에서의 사건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대한민국헌법 제39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며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인 군 가산점이나 돈을 의미할까? 물론 직접적인 보상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보상과는 별개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병역의무 이행을 더 존중하고 배려하는 군 내부와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군대 내 간부들은 국군장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만약 사건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면, 발생 원인부터 과정, 결과까지 투명하게 조사하여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 또한, 개개인의 사회복무요원이 처한 환경을 고려하고, 현역 입대자들과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우해야 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예비 입대자인 필자가 예비 입대자들에게 말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참고문헌> 김지헌(2022), 작년 국방비 지출 미국·중국·인도 순…한국은 10위 유지, 연합뉴스, 2022. 12. 09., https://www.yna.co.kr/view/AKR20221209048800504 고은상(2022), 지난해 합계출산율 0.81명 또 '역대 최저'‥OECD 꼴찌, MBC뉴스, 2022. 08. 24., https://imnews.imbc.com/news/2022/econo/article/6401211_35687.html 송상현(2022), "월세 내면 절반 날아가"…사회복무요원 월급 최저생계비도 못 미쳐, news1, 2022. 08. 21., https://www.news1.kr/articles/?4776622 최병욱(2022), 대한민국 징병제의 딜레마, 미래한국, 2022. 07. 22.,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588 MBCNEWS, "군대 다녀와야 당당한 남자‥" 논란된 병무청 영상 (2021.11.13./뉴스데스크/MBC), 2021. 11. 15. https://www.youtube.com/watch?v=Dqa808c6Pzs 메인사진 _ https://www.pinterest.co.kr/search/pins/?q=군인%20일러스트&rs=srs&b_id=BBONspI5RIrtAAAAAAAAAADfiP5fz6i5VAXKW0AFst2vW6oUUHp6WSNL7xo9TRmxPct969O_MpENsBwlCN2P_YC3gB6xs71v5EXohjD8Y9sW&source_id=rlp_kwJ3W619
제 4 호 시를 읽지 않는 요즘 학생들을 위하여
시를 읽지 않는 요즘 학생들을 위하여 202110353@sangmyung.kr 정기자 송지민 간혹가다 요즘 학생들은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요즘 학생들이 문학 작품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며, 학생들의 입장에 공감한다. 학창 시절, 우리는 문학 작품을 분석해야만 했다. 작가의 출생 연도부터 작가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는지, 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공부한 뒤, 그제야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작품을 읽을 때는, 분석하기 바빴다.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일까? 이 시에서 사용된 표현법엔 어떤 것이 있을까? 시에서 화자의 성별은 무엇일까? 바로 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작가에게 빙의라도 한 듯, 그 문학 작품을 작가의 위치에서만 바라보며 해석하려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작품을 쓴 작가가 아니기에 완전한 공감을 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러한 이유로 문학을 어렵고 지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처럼 시를 단지 지루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과연 우리만의 잘못이었을까? 작년 이맘쯤, 시를 읽은 건 수능 이후로 처음이었다. 낯설었다. 시를 보고, 주제나 분위기를 파악하고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때가 ‘시를 읽었다.’라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시,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을 위해 시를 적어보고 가려 한다. 도시를 좋아하게 된 순간,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손톱에 칠한 색을, 너의 몸속에서 찾아보려 한들 헛일이겠지.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다. 네가 가여워하는 너 자신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한, 너는 분명 세상을 싫어해도 좋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이 행성에, 연애 따위는 없다. 사이하테 타히, 블루의 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그리고 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읽었지만, 그냥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아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아직도 시의 내용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를 읽는 동안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은 여전히 느낀다. 나는 나의 이 울렁거리는 마음의 느낌을 학생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어떻게 같은 시를 보고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겠는가.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으며,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같은 작품을 보고도 누구는 씁쓸할지라도 누군가에겐 그저 담담한 시일 수 있기에, 학생들이 각각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연히 마주한 시 하나에 문학의 매력에 빠질 수 있도록 말이다. 몇 년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시인 한 분이 떠오른다. 그분은 재치 있는 시로 유명하신 시인이다. 혹시라도 하상욱 시인을 모를 수 있기에, 그분의 시를 하나 소개하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다.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듣게돼 - 하상욱 단편 시집 ‘애니팡’ 中에서 이처럼 하상욱 시인은, 시의 진지한 내용 뒤에 제목으로 반전을 주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하상욱 시인의 시가 한창 떠오를 때, ‘저게 문학 작품이 맞냐?’라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문학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일 뿐, 정해진 답은 없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들에 하상욱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학은 즐기는 것이며, 수용자도 작가가 될 수 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문학을 어려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시를 즐길 수 있을지를 말이다. 먼저, 학생들에게 시를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든 활동을 마친 뒤, 마지막에 설명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시에 흥미를 느끼기 전부터 배워야 하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면, 학생들은 시를 공부해서 정복할 대상으로 느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학생들이 시에 부딪혀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위에 설명한 하상욱 시인의 재치 있는 시부터 소크라테스의 시까지 다양한 분야의 짧은 시를 카드로 만들어, 학생들이 모두 읽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미디어의 발달로 종이로 된 책조차 읽으려 하지 않으며, 빠른 정보 전달을 원한다. 또, 교과서에는 고작 몇 편의 시만 나와 있다. 따라서 학생들이 더욱 많은 시를 간결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자신의 문학 감성에 맞는 시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러면 누군가는 유머러스한 시를, 다른 누군가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또 누군가는 자연에 동화되는 시를 고르며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었다면, 사실 시가 우리 삶 속에도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노래는, 시에 멜로디를 입혀 만들었다고 할 수 있기에 이러한 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며,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를 종이에 써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평소엔 그저 멜로디와 함께 듣던 노래 가사를 종이에 시처럼 적어봄으로써,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다시금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 안에서 시의 표현법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평소에 학생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시 속에서 표현법들을 꾸역꾸역 찾아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표현법을 찾는 활동에 자신이 흥미로워하는 요소가 끼워져 있다면, 그 과정은 다를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거치고 나면, 학생들이 시가 분석하여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후에 어떤 학술적인 활동을 하든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때는 시를 심도 있게 바라보는 법이나 간단한 문제 풀이 등의 수업을 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시와 학생들의 거리는 이미 많이 좁혀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습 뒤에는 창작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학생들이 자신의 시를 써보는 것이다. 어렵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모방해도 좋다. 창작은 모방에서 출발하기에, 어느 것이 되었든 직접 자신의 시를 써보는 것은 학생들이 자기의 생각과 신념을 확립하고 감성을 그려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시를 어려워하여 읽지 않는 요즘 학생들을 위해 어떠한 교육을 하면 좋을지 글을 써보았다. 아마 이 글이 나의 올해 2022년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글을 사랑하고 교육에 뜻이 있는 나이지만, 정작 문학 교육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단지 페이지를 채우기만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으로 보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직은 어리숙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예비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한 진정한 문학 교육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비록 다른 글보다 생각하고 쓰는 기간이 비교적 짧았기에 이번 글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만, 방학 동안 위 주제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 한다. 좋은 글을 써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메인사진_하상욱 시인 인스타그램 _ https://www.instagram.com/type4graphic/
제 3 호 꿈을 좇는 사람들
꿈을 좇는 사람들 202010321@sangmyung.kr편집장 주유라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고, 그래서 관둬야겠다 싶으면 꼭 가까워지는 꿈이 당신에게 있는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빛이 난다고들 한다. 강렬한 열망으로 꿈을 좇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꼭 시련과 풍파가 함께 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르윈은 자신이 꼭 이루고 싶은 그 무엇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을 겪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포크송 가수를 꿈꾸는 르윈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르윈은 아주 작은 가게에서 적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포크송 가수이다. 그런 르윈은 유명한 포크송 가수가 되고자 유명 소속사 사장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추운 겨울에 먼 여정을 떠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포스터에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고양이는 단지 귀여움이나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 정도를 담당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영화를 보면 고양이를 영화에 영리하게 이용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다. 광고에 아기나 동물을 넣으면 효과가 좋다는 말이 떠올라서다. 물론 고양이의 등장에 애묘인의 가슴은 뛴다. 하지만 고양이를 물건처럼 갖다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딱딱한 의자에 앉은 기분을 느낀다. 고양이를 이용한 작품을 보는 것은 숨돌리고 쉬었다 가기에 좋지만, 어딘가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어깨 근육과 척추와 엉덩이뼈 곳곳에 단단한 힘이 들어간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의 고양이는 다른 작품에서의 고양이들과 조금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 고양이는 고양이의 역할을 해낸다. 고양이답게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져오거나, 날렵한 몸으로 뛰어다니다가 말랑한 몸으로 르윈의 품에 안겨있기를 반복한다. 여기까지 고양이의 역할은 귀엽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하며 예측 불가하게 구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양이에게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르윈은 우연히 남의 집고양이 한 마리를 떠맡게 되고, 고양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고양이는 잊을 만하면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잡으면 사라지고 버리면 등장하는 것이다. 몇 킬로미터를 걸어 고향을 찾아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의 포스터가 작중에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 채 형태를 바꿔가며 르윈의 마음을 은근히 흔들어댄다. 르윈에게는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가 있지만, 르윈은 곧 그 고양이를 닮은 암컷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그 고양이를 버리자 다리 다친 고양이가 또다시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그리고 처음에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는 다시 르윈에게 돌아온다. 르윈은 끊임없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창밖에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이 잃어버린 고양이라 착각하고 잡아 온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았다며 기뻐하지만, 그 고양이는 사실 잃어버린 고양이를 닮은 다른 고양이었다. 르윈은 그 사실을 알고도 고양이를 챙긴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꼭 껴안고 지하철을 타고다니는 르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르윈에게 게이 같다고 조롱한다. 르윈은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고양이를 들고 다닌다. 어떤 책임감, 생명 존중, 사명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있으니까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에게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같이 있게 된 고양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왜 내게 눈이 달렸는지 의심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르윈은 포크송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먼 길을 뚫고 유명한 소속사의 대표에게 노래를 들려주러 갔다. 돌아온 말은 상업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몸 뉠 곳을 향해 돌아가는 길에 르윈의 모습은 만신창이다. 피곤함, 무기력함, 버거움, 서러움이 중력처럼 그를 붙잡고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긴다. 그때 르윈은 고양이를 버리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 고양이의 갸우뚱한 표정을 잊지 못하리란 것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르윈의 처지에서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과분했을 것이다. 르윈에게는 돈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죽거나 말거나, 어차피 우연히 주운 길고양이였으니 마음 쓸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르윈의 마음은 편치 않다. 르윈이 잃어버린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길쭉하게 늘이고는 “야옹”하고 운다. 돌아온 고양이를 보며 르윈과 관객은 이상한 감정이 든다. 놀랍고 허무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서 다행이기도 하다. 르윈은 다시 작은 포크송 카페의 무대에 올라 노래한다. 다시 원점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르윈은 지난한 길을 견뎠고 꼴통 같은 자신의 추함을 견뎠다. 거지 같은 생활과 추운 바람과 무엇하나 풀리지 않는 일을 견디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견디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는데도 견딘 것이다. 르윈이 그 모든 지리멸렬함을 거쳐 다시 작은 무대에서 포크송을 부를 때 르윈의 눈빛은 누구보다 많이 빛난다. 르윈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포크송을 떠날 수 없었다. 포크송을 때려 치려고 마음먹어봤자,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오는 고양이처럼 포크송은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르윈에게 고양이가, 또는 포크송이 어떻게든 르윈의 곁으로 돌아왔듯이, 열렬히 원하는 그 무엇은 다양한 모양으로 변신해가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열렬히 무언가를 원하다 보면, 그것이 내 신체 부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부풀리기 전에 그저 글을 매일 쓸 때,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전에 그저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가 바로 그저 그 꿈을 묵묵히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포크송은 르윈으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래하다 벌컥 서럽고 화가 나도 다음날이면 노래했고, 퇴짜를 맞고 와서도 노래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르윈의 곁에는 여전히 포크송이 있다. 모든 것이 르윈을 바닥으로, 바닥으로 무너뜨려도 르윈의 포크송은 아무런 표정 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돌고 돌아 다시 포크송이다. 문득 모든 고양이가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고양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고단한 하루였어.” 꿈을 좇는 르윈도 거리를 헤맨 고양이도 모두 그저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간다. 제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깊은 단잠을 잘 것이다. 다시 돌아간 일상이 고작 서러운 날의 연속일지라도 멈출 수 없다. 날이 밝으면 기지개를 켜고 어제보다 개운한 새 하루를 보낼지도 모르니 말이다. 고양이로 태어난 고양이는 고양이의 삶을 살아낼 뿐이다. 르윈에게 고양이는 마치 열렬히 닿고 싶어도 닿기 어려운 꿈과 같은 존재였다. 만날 듯싶으면 멀어지고, 그래서 포기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 품 안에 들어오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꿈은 당신으로부터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놓을 수 없이 열렬한 꿈이 있다면, 분명 그 꿈 때문에 가끔은 추해지고 지치는 날이 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부르게 되는 포크송에는, 진하게 빛나는 눈빛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제 운명을 알고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꿈은 분명 당신의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꿈을 꾸고 노래하는 당신의 눈빛이 더욱 빛나게 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 3 호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202210316@sangmyung.kr 수습기자 정지은 철학이란 무엇일까.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영향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선생님의 첫 수업은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와 내용의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숙제가 있었는지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해 장난식으로 친구들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받는 학생들이 반마다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첫 수업 시간부터 졸면 안 된다는 나만의 철칙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접해왔던 교과서 중심의 수업이 아닌 처음 들어보는 철학적 내용의 수업에 당황했는지,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수업을 들으면서 점점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빠지게 되었다. 그저 선생님이 좋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따라 독서 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각자 느낀 점을 공유하며 이에 대한 발표 자료와 보고서를 쓰는 활동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철학에 대해 일면식조차 없었던 나였기에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반복하여 읽다 보니 소크라테스에 대해 점점 관심이 생겼고 곱씹어 생각할수록 새로운 사상과 생각들이 등장하면서 흥미를 느꼈다. 부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가 추구하는 진리와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어김없이 고등학교 선생님을 따라 나 또한 소크라테스의 팬이 되었다. 그 덕분에 목표를 다지고 나만의 삶을 그려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 그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학교에서 사회탐구를 선택한 학우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분명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 소프로니스쿠스와 산파인 어머니 파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소피스트, 쉽게 말해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칭하며 자신을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날마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오류와 모순을 드러내어 무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로 고발했고 그는 결국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플라톤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은 스무 살에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철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는 직전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는 아테네에 학원을 짓고 연구에 매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만의 어법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기에 어디서부터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생각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 그의 사상들 무지에 대한 자각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유명해진 이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 말은 그리스 잠언으로 델피 신전에 새겨진 문구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신탁을 통해 깨닫게 되었고, 의미를 알게 된 후 자신의 삶을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전념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란 대체 무엇일까. 덕을 지식이라 여긴 소크라테스를 생각해 보면 진리와 지식에 대한 무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에게도 지식을 가르친 적이 없고 그저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는 자신이 얼마나 지식을 알지 못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알음이 얼마나 얕은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의 결론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던 중, 자신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처음 이 부분을 보고 ‘그래, 인정하지 않기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똑똑한 사람이었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신탁을 인정한 것이었다. 고로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큰 무지는 스스로에 대한 무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인정하게 된 이유를 듣고 생각이 짧았다고 느끼며 나의 무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산파법,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산파법은 문답을 주고받는 가운데 상대의 막연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참되고 바른 개념으로 이끌어 내도록 하는 방법이다. 아이를 낳을 때, 아이를 받고 산모를 도와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산파의 역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무지(無知)를 깨닫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요시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는 스스로를 자신 어머니의 직업에 비유하여 영혼의 산파라고 자처하여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이끌었다. 소크라테스는 용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무지를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성찰적인 태도를 기를 수 있게 도왔다. 단순히 지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이성의 기능까지 강조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여러 대화편을 보면, 그는 한 용어의 개념을 가지고 오랜 시간 질문과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상대방이 정확히 그 개념이 무엇인지에 관해 물을 때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는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이 혼자 깊이 생각하고 그들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용기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변론하며 재판과 판결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후 제자들과 그의 친구인 크리톤은 그를 감옥 밖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설령 악법이라 할지라도 시민들이 정해둔 법에 복종하는 것이 사회와의 약속,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며 탈옥 권유를 거절한다. 분명 판결과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으로 인도하는 현실에 수긍한 것이다. ‘변명’이라는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대는 것, 혹은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변론하고 대화하는 것이 주 내용이기는 하나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대범함과 용기가 잘 나타난다는 점에서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용기’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고 도는 시대, 우리도 소크라테스처럼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에 관심을 집중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에 대한 진리, 철학적인 탐구에 집중했다. 사물에 대한 탐구보다는 우리 주변, 인간의 특성에 조금 더 집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함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의 의미, 사유하는 삶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특히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명심하고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여긴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다룰 줄 아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무지에 대한 자각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다. 어째서 몇 세기가 지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소크라테스가 살아왔던 시대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상황 자체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아테네 사람들은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고, 현대 사회의 모습도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돈, 권력을 중요시하며 그것이 학벌이 되고, 그것이 사회적 지위가 된다. 특히나 교육에서의 모습 더욱 그러하다. 아테네에서 자신이 똑똑하고 진리를 깨달았다며 스승임을 자처하는 소피스트들은 젊은이와 정치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비싼 수업료를 받고 그들에게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수단으로서의 말재주만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유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묻고 답하며 정직함이란 무엇인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레 소크라테스의 팬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떠올려 보면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배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의 배움을 살펴보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그것에 관해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르는 게 생기면 질문하고, 생각하고, 궁금증을 푸는 것은 분명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내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이 남들에게 밝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용기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나 또한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언제 질문을 해야 할지 타이밍만 노리다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개인의 용기도 중요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을 시간을 끄는 사람, 모르는 게 있는 멍청한 사람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가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처럼, 질문하는 사람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대단한 사람, 모르는 것을 배워나가기 위해 용기를 낸 현명한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당연한’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소피스트들처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모르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 채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교육의 방향과 사회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향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질 세상을 기대해 보는 바이다. <참고문헌> 플라톤(1999), 『소크라테스의 변명』, 문예출판사. 소크라테스, 두산백과, 2022.08.08.,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4187&cid=40942&categoryId=33469>
제 3 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202010189@sangmyung.kr 정기자 장아현 우리 사회에서는 이해(理解)가 필요하다. 이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는 타인의 상황을 보며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사정을 잘 헤아렸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나눌 때 이해한다는 말은 그리 어렵지 않게 뱉지만,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하여 내가 아닌 존재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쇼핑백과 지우개 때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친구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강서구에 위치한 ‘ㄷ’직업재활센터에 방문하였다. 떠올려보면 그때는 그저 친구 손에 이끌려서 갔던 것 같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가벼운 마음으로 말이다. 도착하니 창고 같은 곳에 넓은 책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넓은 책상을 둘러싼 의자에 많은 사람이 앉아 제각각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담당자분은 우리도 그 의자에 앉게 하고 간단하게 쇼핑백 접는 방법을 설명해주신 후, 우리가 이제 쇼핑백을 접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쇼핑백만 하염없이 접었다. 쇼핑백을 다 접자, 담당자분은 지우개 포장하는 법을 알려주셨고 또 우리는 한참 동안 지우개 포장을 하였다. 이렇게 같은 일을 계속하니, 슬슬 ‘이게 왜 봉사지? 그냥 일을 대신 해주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친구와 나는 그새 손에 익어버린 일감을 처리하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원래라면 돈 받고 해야 하는 부업 아니야? -그러게, 쇼핑백 접고 지우개 포장하는 게 왜 봉사인 걸까? 그렇게 우리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지녔다. 처음에는 소심한 성격 탓에 묻기를 포기하였지만, 결국 봉사의 정체성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생겨서 나는 조심스레 담당자분께 여쭈었다. 이에 담당자분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아주 친절하게 해주셨다. -학생들과 함께 앉아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장애를 지닌 분들이에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요. 설령 일자리를 구했다고 하여도, 한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죠. 그게 이 센터의 설립 이유예요. 센터는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모두 할 수 있을 정도 난이도의 일감을 외부 업체로부터 의뢰받아요. 그렇게 의뢰받은 일을 하며 급여를 받는 거예요. 장애를 지닌 분들이 일자리 갖고 스스로 돈을 벌도록 해주는 곳이죠. 하지만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만약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 센터에 일감이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그럼 그분들도 일자리를 잃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가 계속 쇼핑백을 접고, 지우개를 포장한 것이었다. 그제야 뒤늦게 내가 한 봉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어르신분들의 거동을 도와드리는 것, 도시의 쓰레기를 줍는 것 등의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행위만을 생각했다. 한 번도 그런 어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봉사를 하고 있음에도 직업재활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이며, 그곳이 어떤 것을 필요로 할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떠한 봉사활동인지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찾아내지 못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 활동의 ‘쇼핑백’과 ‘지우개’는 그저 어떤 이들의 어려움을 함께 공유한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봉사활동인지 고민하는 과정 속에는 오로지 단순노동을 반복하는 나의 상황만이 있었다. 이 경험으로 타인의 구별과 정립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진정 깊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보내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 선물 받은 책 <그래도 괜찮은 하루>는 청각장애를 지닌 구경선 그림작가의 수필이었다. 그때 한참 다양한 에세이를 읽고 수필이라는 장르에 질려버린 터라, 흔한 교훈을 전달하는 내용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흥미가 떨어졌었다. 그렇게 한동안 책상 위에만 두고 읽기를 미뤄두었다가 한참 후 보게 된 그 책에서, 내가 몸소 배운 깨달음이 있는 곳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귀가 안 들리는 구작가와 그녀가 지닌 허술한 이력서는 모두에게 거절만 당할 뿐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가치를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은, 일자리의 의미를 일깨워줬던 장애인직업재활센터의 봉사활동을 떠오르게 했다. 책에는 이러한 좌절과 역경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하는 과정이 담겨있었다. 그림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며, 인생을 스스로 재정립하고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구작가는 비교하지 않았기에 행복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며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처음에는 ‘긍정적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은 그만뒀다.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은 내심 행복을 느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편협한 나의 전제가 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다시 진정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느꼈다. 구작가의 토끼 캐릭터 ‘베니’ [사진 출처: instagram.com/hallogugu] 구작가는 청각장애를 가졌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한계를 만났다. 장애는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는 것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중 구작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스스로의 ‘가치’였다. 구작가를 원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코로나 이후 장애인 고용률이 다시 한번 하락하였다. 장애인 구직급여 신청현황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2020년 코로나 확산 이후 일평균 100명에 가까운 장애인이 일자리를 잃고 있는 셈이다. 그간 장애인 일자리의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음에도, 현재까지도 장애인 고용률은 34.6%밖에 못 미치고 있다. 제도개선과 예산 증가 등의 노력에도 정작 실제 고용률은 낮아진 상황이다. 물론 팬데믹 상황은 모든 것을 악화시켰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취약계층 등 상대적으로 더 큰 어려움과 변화를 겪는 이들이 존재하였다. 대개 위기란 것은 약한 것에 더 강하게 닥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팬데믹 상황, 그전에도 어려웠었다. 그간 충분히 이해받지 못해왔던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 어리석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다른 ‘낯선’ 존재로 여긴다. -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 우리네 삶은 어렵다. 또 특정 사람들에게 유독 특정한 어려움이 찾아온다. 장애를 지닌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바로 그 사람을 본인과 가깝게 여기지 않아서일 것이다. 무언가를 진정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 만든 더불어 사는 삶이야말로 모든 이의 ‘나’를 더욱 ‘나’로 만들 것이다. 결국, 이 세상 허물을 모두 벗기면 모든 사람은 같은 크기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양종곤(2022), TV 속에만 있는 '우영우'…5년짜리 정책도 무색한 장애인 고용, 서울신문, 2022.07.25. <https://www.sedaily.com/NewsView/268NS67GEB>
제 3 호 먹고 살기 힘든 요즘 세상
먹고 살기 힘든 요즘 세상 201710846@sangmyung.kr 정기자 임지혁 [1]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올해 6월의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의 같은 달과 비교했을 때 6% 상승했고, 이는 IMF 시기인 1998년 이래 처음 기록한 수치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의 임금 또한 인상되었다면 정상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식할 수 있겠지만 같은 기간 공무원 임금은 1.4% 높아졌을 뿐이고, 최저임금은 그나마 5.1% 상승했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가난해졌고, 고로 소비력이 낮아졌다. 모교 학식의 가격이 이제는 6,000원이어서 비싸다고 느껴지지만 이마저도 학교 밖에서는 어렵게나마 맥도날드 빅맥 세트를 먹을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주식 및 금융 시장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인다. 코스피 수치는 작년 2021년 7월 5일 3,293을 기록했지만 2022년의 같은 날에는 약 30% 낮아져 2,336이 되었다. 국내 외화보유액은 환율 방어를 위해 사용되어서 2021년 4,631억 달러에서 올해 6월에는 4,383억 달러로 감소하였지만 7월 5일 지금의 시점에서 원 달러 환율은 1,299원으로 1년 새 150원 이상 상승하였다. 그 이유는 국제적인 다발적인 위기와 인플레이션은 물론이고,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한미의 금리가 1.75로 같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금리를 조정하기에는 국내 부동산 문제, 대출 문제들이 엮여서 복잡한 문제이다. 금융 당국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문제이겠다. 어렵다. 가깝게는 리먼 브라더스, 우리 사회에 상처를 준 IMF,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일 쇼크 시대를 경험한 우리 사회이지만 일선의 담당자가 분투하는 가운데 뚜렷한 전략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20일 현 경제 상황에 대해 “이거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방도는 없습니다”라고 답변했으며 취임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날 즈음, 6월 말부터 한국갤럽, 리얼미터 등 다수의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데드크로스를 경험하고 있다. 여당은 물가 및 민생안정 특위를 결성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논의된 것은 부동산 문제나 종부세 기준 완화, 영끌족 등 ‘보편적인’ 물가 및 민생안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경제위기대응특위를 구성했지만 전체적인 당 차원의 내부적인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이번의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금리와 물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으로 몰리고 있지만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지금만의 일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을 자살 문제, 88만원 세대, 노동 문제, 페미니즘 문제 등 우리 스스로가 살아가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예전에 유행했던 ‘헬조선’이 아무래도 이런 문제점들을 통칭하는 단어였을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분명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잠재하고 있다. 가령, 지난 4월에는 간호사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요지의 문화제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원래는 간호사들의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는 문제를 취재하고 도심 각지에서의 노동계의 시위 등, 노동 문제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려 할 의도였다. 그곳에서 만났던 경기도 ㅇ병원의 조 간호사님은 처음에는 간호계의 노동 환경의 문제점, 가령 인력이 부족하여 양질의 의료 서비스의 제공이 어렵거나 간호사 개개인의 화장실을 갈 시간조차 없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점차 대화의 주제가 바뀌며 요즘 육아의 어려움, 정치권에 대한 실망 등 사회 전체적인 내용으로 확장되었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2000년대 이후로 줄곧 들었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들. 이마저도 아직 주유소의 평균 기름값이 2000원을 돌파하기 이전의 일이다. [2] 어느 날 문득 길상사에 올랐다. 맑고 향기롭게, 법정스님과 대원각의 김영한, 백석과 박헌영. 언뜻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얽힌 장소이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아닌 법정스님의 만년필을 구경하기 위함이다. 법정 스님께서는 만년필을 즐겨 사용하셔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에만 급급해서 자연의 섭리마저 무시한 우리들에게 이 책에 나오는 법정스님의 일화는 우리를 너무도 부끄럽게 만든다. 이 책에 따르면 한 번은 도쿄대학에 유학중이시던 스님께서 법정스님이 좋아하시는 촉이 가는 만년필을 사오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그 만년필을 고맙게 소중히 쓰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스님께서 파리에 가셨더니 그곳에 똑같은 만년필이 잔뜩 있어서 촉이 가는 만년필을 하나 더 사오셨더니 처음 가졌던 필기구에 대한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져 버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나중 산 것을 아는 스님께 드리고 나니 비로소 처음의 그 감정이 회복되셨다는 것이다. 삼선교의 사거리에서 북쪽 길을 따라 오르면 길상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7월의 한여름이었다. 북악의 선선한 산 공기가 반가웠다. 그 곳의 어느 한 건물에 들어서면 법정 스님의 유품이 정돈된 곳이 있다. 유리 너머로 바라본 법정 스님의 만년필은 분명 프랑스 D사의 것이었다. 칠(漆)로 마감된 긴 몸통과 특유의 긴 길이의 클립, 그리고 다소 평평하게 길게 빠진 펜촉은 분명 40여년 전 D사가 만들었던 만년필이었다. 아마 최고급의 부띠크(boutique) 매장에 전시되었을 프랑스제 만년필, 그러나 본래 법정 스님의 만년필은 독일의 몽블랑(Montblanc)에서 만든 만년필로 알려졌다. 몽블랑은 오늘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 값 비싼 만년필을 제작하는, 그야말로 현대 최고의 만년필 제조사이다. 그래서인지 ‘법정 스님께서 쓰시는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우리 사회는 수없이 많은 곡해를 하였다. 가령 무소유를 주창하신 스님께서 ‘몽블랑 149 만년필’만큼은 소유하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면서 몽블랑이라는 회사의 명예를 드높이고, 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에 빗대어 펜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스님께서 몽블랑을 쓰셨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범부(凡夫)의 눈에 비친 만년필이, 그리고 그것을 즐겨 사용하신 멋쟁이 스님의 뜻이 곡해되는 것은 마음에 성치 않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그 만년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내걸기를 주저한다. 그렇기에 당신께서 만년필을 즐겨 쓰셨고, 그 흔적이 만년필에 아름답게 남아있다는 이야기만을 이곳에 남기고 싶다. [3] 길상사에서 나오자 다시 현실과 마주한다. 올해 초 대통령 내외의 방문으로 논란이 되었던 나폴레옹 빵집, 그곳에서 맛있어 보이는 빵을 하나 찾았지만 가격표에 차마 지갑을 꺼내지 못하고 발길을 뒤로했다. 어려움은 여전히 실존했다. 당국과 정치권은 오늘날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우리당도 잘하네요 계속 이렇게해야” 라거나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라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서는 오늘날의 중첩된 어려움들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하원 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양안 위기가 고조될 때 대통령이 휴가를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다. 어두운 시대이다. 마주한 작은 전쟁들 속에서 큰 전쟁을 우려하고 있고, 물가 상승 속에서 우리들의 실질 소비력은 낮아지고 있다. 새로이 날아오른 국산 전투기와 신형 이지스 군함이 우리를 지켜줄 수는 있겠지만 이것들은 만약의 가능성에 대비한 보험일 뿐이고, 정치-경제적인 실질의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런 고민들을 잠시 접어두고선, 오랜만에 보았던 멋들어진 만년필을 떠올리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걷나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그늘막 속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부산외고 1학년 정승익(1998), [학생문예 - 산문] '산에는 꽃이피네'를 읽고, 부산일보, 1998.10.17.,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81017000554>
제 3 호 축구…좋아하세요?
축구…좋아하세요? 202110483@sangmyung.kr 수습기자 양현준 4년에 한 번 열리는 FIFA 월드컵은 전 세계가 열광하는 지상 최고의 축제이다. 여러 스포츠 종목들과 비교하였을 때에 시청자 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만큼 최대 규모의 대회이다. 유럽부터 남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스포츠 경기 중 대개 시청률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남자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이다. 그러나 현재 남자축구 국가대표팀 경기가 아닌 각 나라별 축구 리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과거에 비해 떨어져 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와 관심을 끌고 있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제외하면, 유럽 5대 축구리그 중 나머지 4개 축구리그에 대한 관심은 지속해서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는 현재 10~20대가 과거 세대보다 스포츠 자체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2017년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 시청자 수는 5,800만 명이었다. 이에 비해 미국 프로야구 MLB 월드시리즈 결승전 시청자 수는 3,800만 명, 미국 프로농구 NBA 챔피언 결정전 시청자 수는 3,200만 명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는 MLB와 NBA 모두 오랜 인기와 역사를 가진 스포츠이기에 꽤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래도 아직 UEFA 챔피언스리그 축구 결승전의 시청자 수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리그 오브 레전드(LOL), 즉 e스포츠는 젊은 세대가 주 시청층이기에 미래에는 축구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왜 젊은 세대들은 스포츠에 무관심해진 걸까. 빠르고 간결한 젊은 세대들 현재 젊은 세대는 무언가 한 가지를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소개해주는 유튜브 영상을 본다면, 영상을 본 후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는 사람보다 결말까지 포함된 짧은 줄거리 영상만 10분에서 20분만 보고 끝내는 사람들이 현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넷플릭스나 유튜브 영상을 보아도 배속해서 보거나 10초 스킵 등을 통해 재미없는 장면을 넘기며 보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유튜브에 Shorts라는 형태의 1분 미만의 영상이 등장한 이유도 유튜브가 젊은 세대들이 비교적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인 만큼 이러한 경향성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현시대에는 스포츠보다 더 재밌고 더 즐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e스포츠다.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축구의 차이점 e스포츠란, Electronic Sports의 줄임말로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따위를 통해서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지는 게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피파온라인4 등이 크게 유행하고 있고 서구권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뿐만 아니라 포트나이트, 도타 등 다양한 e스포츠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는 연기된 상태이지만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 배틀그라운드모바일, 피파온라인4, 하스스톤, 스트리트파이터, 아레나오브발러(왕자영요), 도타2 등이 정식 e스포츠 종목으로 채택될 만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고 시장 규모 또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e스포츠가 축구와 달리 젊은 세대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e스포츠인 리그 오브 레전드(LoL)와 축구를 비교해보았을 때, 세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유행이 빠르게 바뀐다. 축구 역시 전술적인 유행이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패치에 비하면 아주 늦게 바뀌는 편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는 매 시즌마다 새로운 아이템 등을 만들고, 매주 업데이트를 진행하여 챔피언을 출시하고, 성능을 하향 또는 상향하여, 단순하거나 지지부진한 흐름이 오래갈 수 없도록 한다. 두 번째, 접근성이 좋다. 축구가 대중적인 스포츠가 된 이유 중 하나는 공 하나만 있어도 모두가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축구를 하기 위해 장소를 섭외하고 인원을 모으는 일이 동호회 등이 아닌 이상 쉽지 않다. 그러나 e스포츠는 컴퓨터 하나만 있어도 즐길 수 있기에 축구보다 접근성이 훨씬 좋다. 게다가 길을 조금만 걸어도 흔하게 보이는 게 PC방이다. 세 번째, 매 순간 눈을 뗄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 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로 인해 빠른 흐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축구 경기 중 매 순간 집중하여 볼 만큼 재밌는 경기는 손에 꼽는 편이다. 골이 나오지 않고 수비만 하는 지루한 경기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지루한 경기도 있을 수 있으나 게임 특성상 한 번에 여러 곳에서 변수가 발생할 수 있기에 비교적 지루함이 덜 할 수 있다. 우리가 알던 축구가 사라질 수 있다, 축구 룰 이렇게 바뀐다? 어느 한 해설위원이 유튜브 채널에서 골대 크기를 늘리자는 둥 축구도 농구처럼 3점 슛 즉, 먼 거리에서 들어간 중거리골은 2점을 주는 것은 어떠냐며 재밌을 것 같다며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농담 삼아 했던 얘기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축구계는 젊은 세대가 축구를 보지 않아 점차 인기가 떨어지는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FIFA에서도 위기라고 느꼈는지 시대 흐름에 맞게 룰을 개정하여 이를 FIFA U-19 유스 토너먼트 대회에서 실험 중이다. 룰 개정안은 다음과 같다. 전 후반 시간을 30분으로 단축함과 동시에, 농구와 같이 공이 경기장을 나갈 때마다 시간을 멈춘다. 몇몇 통계에 따르면 현재 실제 경기 시간은 60분 내외라고 한다. 이러한 룰의 변화는 축구 경기를 더욱더 함축적이고 체력적으로도 더 재밌는 경기가 가능해지게한다. 다음은 무제한 교체이다. 무제한으로 선수를 교체하여 선수들의 체력 안배와 전술적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 활용 폭이 넓은 팀에 유리할 수 있다는 단점 역시 존재한다. 또 하나는 공이 터치라인 밖으로 나갈 시 스로인 즉, 손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킥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는 풋살과 유사한 형태이다. 다양한 세트피스가 추가되는 효과가 있으며 피지컬과 킥이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측면만 공략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경고를 받으면 필드 밖으로 5분간 퇴장하는 규칙이다. 거친 플레이를 제재하고, 시간 지연 방지에 효과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수가 빠져 있는 팀은 선수가 돌아올 때까지 볼을 돌릴 우려가 있다. 이러한 룰의 변화가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아 재밌겠다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반면 단점들과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거부감을 내비치는 사람 역시 존재한다. 축구의 부흥을 위한 슈퍼리그 프로젝트 작년 스페인 라 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인 플로렌티노 페레스 로드리게스(Florentino Pérez Rodríguez)가 슈퍼리그 창설을 선언하면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슈퍼리그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과 스페인 라 리가 소속 그리고 세리에 A 소속의 빅클럽이라 불리는 각 나라의 구단들끼리 승강제 없는 하나의 리그를 창설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매주 이슈가 될만한 경기가 펼쳐져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며, 중계권과 광고의 수요 등이 커져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슈퍼리그 창설을 추진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관중을 받지 못하면서 많은 축구 클럽들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슈퍼리그 참여시, 창단 12개 팀은 4,000억 가량의 금액을 받을 수 있으며 승강제가 없어 안정적인 큰 수익을 낼 수 있기에 재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축구 산업 자체의 부정적인 전망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이가 어릴수록 축구를 보는 인원이 크게 줄고 있기에 이는 축구 산업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축구 산업을 부흥시키려는 의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연고 스포츠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현지 팬들, 선수들의 극심한 반대로 속해 있던 클럽들이 탈퇴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OTT 플랫폼의 2차 창작물, 스포츠와 미디어의 결합 앞으로 축구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존 팬들의 니즈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팬들의 유입까지 이끌어야 한다. 어쩌면 OTT 플랫폼의 2차 창작물이 이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OTT 플랫폼이란 영화, TV 방영 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현재 여러 OTT 플랫폼에서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내놓고 있다. 스포츠 특성상 위대한 선수와 팀 그리고 기록 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기에 이는 좋은 스토리 라인으로 이어진다. 2018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잉글랜드 2부리그로 강등된 이야기를 담은 <죽어도 선덜랜드>, 2022년 왓챠 다큐멘터리 아스널 FC의 무패우승 과정을 담은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 등 귀감을 주는 다큐멘터리가 많이 등장하였다. 기존 팬들은 본인이 모르고 있었던 내용을 알게 될 수도,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다.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지고 본 사람들은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 축구, 스포츠가 가지는 낭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팬이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축구…좋아하세요? “축구가 망해간다”라는 말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축구는 여전히 인기가 많고, 각 구단은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축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걱정처럼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계속하여 받지 못하게 된다면 50년 뒤에도 100년 뒤에도 지금 같은 위치에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직은 조금 이를 수 있지만, 축구계의 부흥을 위해 앞서 언급한 축구 룰 개정, 슈퍼리그 창설 등 획기적인 논의들이 계속되고 있다. 한 가지만은 명심했으면 좋겠다. 축구가 견제해야 할 대상은 다른 스포츠뿐만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모든 콘텐츠임을. 나는 한 축구 팬으로서, 축구 인기가 지금보다 많아져 축구를 보며 느끼는 여러 감정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들은 “축구…좋아하세요?” <참고문헌> 박민제(2020), “443000000명이 보는 E스포츠, 한국은 축구로 치면 브라질 급”, 중앙일보, 2020. 1. 3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93010#home> 이스타TV, [방구석토크] 시간단축!! 무한교체!! FIFA가 생각하는 룰 변경안은?, 2021. 7. 19., <https://www.youtube.com/watch?v=FcOm0Auri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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